콜럼버스의 날에서 원주민 저항의 날로

입력
2022.09.29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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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아니게 덥다며 손부채를 부치고 있었는데, 가늘가늘 코스모스가 슬그머니 왔다가 시들고 있었다. 할머니 집에 추석인사를 갈 때면 무더기로 피어 있는 가을의 첫인상 같은 꽃이었는데. 평년보다 추석이 빨라서였을까, 올해 가을은 제대로 인사도 못 나누고 시작했다가 가버릴 것 같아서 아쉬워졌다.

계절뿐 아니라 역사 속 인물에 대한 인상도 첫 만남이 영향을 주곤 한다. 중남미 취재로 처음 책 쓰는 일을 시작한지라 콜럼버스는 내내 불편한 존재였다. 중남미에 뿌리 깊게 남은 원주민들의 망가진 삶과 식민지배에 대한 저항의 발버둥을 보고 나면, 우리가 쉽게 말하는 '신대륙 발견'이라든가 '역사상 가장 위대한 항해' 같은 문구에 고개를 끄덕일 수가 없다. 금광을 찾겠다는 욕망과 제 종교를 세계에 퍼트리겠다는 열망이 대서양을 가로지르는 직선의 항로를 열긴 했지만, 그 배들에 실려 간 건 노예로 팔리거나 학살을 당하거나 밑바닥까지 빼앗겨야 했던 한쪽의 피눈물이었다.

그러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에 처음 닿은 '1492년 10월 12일'을 대대적인 국경일로 삼는 스페인을 취재하게 됐다. 도시마다 불쑥불쑥 나타나는 콜럼버스의 흔적들. 바르셀로나의 관광 1번지 람블라스 거리를 걷다가 자연스레 발길이 항구로 이어지면, 지중해와 만나는 광장의 높은 기둥에 바다를 향해 손가락을 뻗은 콜럼버스 동상이 자랑스레 서 있었다.

이탈리아 출신으로 본명은 콜롬보(Colombo), 스페인 어로는 콜론(Colón)이라고 부르는 콜럼버스가 에스파냐 왕실까지 찾아온 건 여러 나라에서 거듭 거절당한 끝이었다. 곱게 키운 오렌지나무 사이로 층층이 분수가 이어지는 코르도바 알카사르 정원에는 국토회복전쟁을 치르며 이곳에 머물던 이사벨 여왕과 페르난도 왕, 그리고 이들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콜럼버스의 첫 만남을 기리는 동상이 서 있다.

알람브라 궁전으로 가는 시내버스 출발점이자 관광객들이 가이드를 만나는 약속장소로 애용하는 그라나다의 광장에서도 콜럼버스가 이사벨 여왕을 만나고 있었다. 신대륙을 향한 콜럼버스의 항해를 후원하겠다는 계약을 체결하는 장면으로, 콜럼버스의 날 400주년을 기념해 세운 동상이다. 수익의 10%는 물론 신대륙 총독의 지위와 영구적인 세습까지 원했던 그와 왕실 사이의 계약은 끝내 지켜지지 않았지만 말이다.

금은보화를 찾겠다는 콜럼버스의 호언장담은 4번에 걸친 항해에도 불구하고 실패로 끝났다. 그가 도착한 곳이 '인도'가 아니라는 사실도 모른 채 카리브 섬에 '서인도 제도'라는 엉뚱한 이름만 붙여주고는 쓸쓸히 죽었다. 지금은 세비야 대성당의 한자리를 차지한 무덤은 "다시는 스페인 땅을 밟지 않겠다"는 유언에 따라 스페인 옛 왕국의 왕들이 관을 어깨에 멘 모습으로 만들어졌다. 콜럼버스의 입장에서는 바닥에 내려지는 것도 싫을 만큼 허무하게 끝난 모험이었나 보다.

곧 다가올 10월 12일, 한때 미국에서 축제처럼 열리던 '콜럼버스의 날'은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 단어가 되었다. 이제 중남미 국가에서는 그와의 첫 만남이 결코 유쾌한 시작이 아니었다며 '원주민 저항의 날'로 바꿔 부를 것을 선언한다. 서구 중심의 시각으로 쓰여졌던 그간의 기록들도 다시 곱씹으며 되돌아보는 중이다. 부끄러운 역사를 정직하게 대면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이 가진 마지막 위대함일 테니 말이다.


전혜진 여행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