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인! 이강인! 이강인!"
27일 오후 9시 40분 서울 상암동 서울월드컵경기장. 2022 카타르월드컵을 앞두고 펼쳐진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과 카메룬의 2차 평가전이 거의 끝나갈 즈음 6만여 관중들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일제히 이강인(21·마요르카)을 외쳤다. 이때 처음 경기장에 이강인을 부르는 메아리가 울려 퍼졌다. 관중들은 이후 2, 3분 간격으로 여러 번 이강인을 연호했다. 그러나 끝내 이강인의 모습은 그라운드 안에서 볼 수 없었다. 선수 출전 결정권을 쥔 파울루 벤투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의 판단이었다.
볼멘소리는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한 20대 여성 관중은 "우리 또래 이강인을 보러 왔는데 안 나오나 보다"라며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관중들은 "시간이 없는데 이강인은 언제 넣나", "왜 이강인을 안 넣지?", "이럴 거면 이강인을 왜 불렀어?" 등 벤투 감독을 향한 원망의 목소리를 숨기지 않았다. 전도유망한 대한민국의 젊은 선수가 기회조차 얻지 못한 결정에 속상해서 나온 울림들이었다. 경기는 1대 0으로 승리하며 끝났지만 관중들은 쉽사리 자리를 뜨지 못했다.
이에 따라 이강인은 결국 운동장에서 단 1초도 뛰지 못하고 그대로 스페인으로 돌아가야 했다. 지난해 3월 한일전 이후 1년 6개월 만에 대표팀에 합류해 물오른 실력을 보여줄 각오였다. 그러나 유럽파가 포함된 완전체로 치른 마지막 평가전인 코스타리카, 카메룬전에 모두 출전 기회를 잡지 못했다. 두 달 뒤 있을 카타르월드컵 최종 엔트리 확정도 불투명하게 됐다.
이강인도 이날 관중들의 외침을 들었다. 그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경기장에서 많은 분들이 제 이름을 불러주셔서 큰 감동을 받았다"며 "그 함성과 성원에 걸맞은 선수가 될 수 있도록 항상 노력하겠다. 정말 감사하다"고 글을 남겼다.
이강인의 대표팀 합류는 사실 국민들이 성사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스페인 라리가에서 현재 도움 부문 공동 1위(3도움)를 기록 중인 그에게 국민들의 눈과 귀가 쏠렸다. 지난해만 마요르카에서 선발 출전 보장도 받지 못했던 이강인이 약점으로 지적됐던 체력, 수비 등을 완벽하게 보강해 최상의 실력을 보여주고 있어서다. 이강인에 대한 많은 축구팬들의 기대는 언론까지 흔들었다. 오랜 기간 이강인을 외면했던 벤투 감독은 이런 반응을 무시할 수 없었을 듯하다.
9월 A매치 평가전이 열리기 전까지 대표팀 최대 이슈는 이강인의 합류 여부였다. 벤투 감독은 이러한 흐름을 깨지 못하고 이강인을 불러들였다. 지난 6월 손흥민(30·토트넘 홋스퍼)의 소속팀 토트넘이 방한했을 때 'K리그 올스타'로 뛰며 팬들에게 눈도장을 받은 양현준(20·강원FC)도 포함됐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강인의 평가전 출전은 가능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벤투 감독은 끝내 이강인을 교체 선수로도 출전시키지 않으면서 국내 팬들에게 실망감을 안겨줬다.
벤투 감독은 카메룬전을 끝낸 뒤 이강인 관련 질문을 피해갈 수 없었다. 그는 "귀가 2개이기 때문에 (이강인을 외치는 소리를) 듣지 않을 수가 없었다"면서 "잘 들었다. 그만큼 팬들이 이강인을 좋아하니까 그렇게 외쳐주셨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전술적인 이유로 이강인을 선택하지 않았다고 했다. 벤투 감독은 "경기 도중 팀이 무엇이 필요한지 분석을 거쳐 이강인 대신 다른 옵션을 선택한 것"이라며 "이강인의 결장은 전술적이고 기술적인 선택이었을 뿐이다. 이번 9월에 치른 두 경기 모두 이강인이 출전하기엔 좋은 기회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고 전했다.
이로써 이강인이 월드컵 대표팀 최종 명단에 이름을 올릴지도 미지수가 됐다. 벤투 감독이 장시간 이동을 요하는 스페인에서 이강인을 불러놓고 활용하지 않은 건 자신의 전술과 맞지 않는다는 판단을 내렸을 가능성이 크다.
이영표 강원FC 대표이사 겸 대한축구협회 부회장도 이강인의 결장에 아쉬워하면서도 벤투 감독의 결정을 존중해야 한다고 전했다. 이 부회장은 28일 YTN '뉴스라이더'에서 "최근 많은 팬들과 언론에서 이강인이 경기에 뛰어야 한다 등 얘기가 많이 나왔다"면서 "그런 것들이 팀의 내부를 단속하는 감독 입장에선 어떤 외부의 영향이라고 느꼈을 수도 있다"고 밝혔다.
벤투 감독의 선수 결속을 위한 판단이었을 것으로 봤다. 이 부회장은 "26명 모든 선수들이 지금 본인이 경기를 뛰는 것에 엄청난 관심을 가지고 있다"며 "이런 상황에서 팀의 조직력과 내부의 어떤 결속을 책임져야 되는 감독 입장에서 외부의 목소리에 반응하는 모습을 보이면, 오히려 선수들을 컨트롤하는 데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경기가 진행되면서 이기거나 지거나 비기고 있을 때 혹은 부상이 발생했을 때, 또 전술에 따라서 선택이 달라질 수 있다. 아쉽기는 하지만 감독의 선택을 존중해 줘야 되지 않을까 싶다"고 말했다.
관중들의 외침은 대표팀을 넘어 현장의 축구 관계자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이 부회장은 "어제 경기장 안에서 축구팬 여러분들의 분위기는 이강인을 보고 싶다는 열망이 아주 강했다"고 현장 분위기를 전했다.
그는 이강인의 마음도 살폈다. 이 부회장은 "이강인 입장에서는 상당히 곤란할 것 같다. 왜냐하면 본인은 경기에 출전할 수 있는 선택권이 없는 상태에서 누구보다도 출전하고 싶겠지만, 자기가 경기에 출전하는 결정권을 갖고 있는 감독은 움직이지 않아서다"라며 "팬들이 너무나 강력하게 요구를 하니까 그 사이에서 약간 심리적으로 혼란스러움을 느낄 수도 있을 것 같다"고 했다.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이강인이 더 성장하길 바랐다. 그는 "제가 알기에 이강인은 정말 기술적으로도 뛰어나고 어린 선수라서 대한민국 축구를 앞으로 10년 동안 이끌어갈 재목 중의 하나다. 정신적으로 상당히 나이에 걸맞지 않게 성숙한 선수다"라고 말했다. 이어 "이런 약간 혼란스러운 상황도 분명히 잘 이겨낼 거라고 생각하고, 이런 경험들을 통해서 대한민국을 10년 동안 앞으로 책임지는 훌륭한 선수로 성장했으면 좋겠다"고 조언했다.
대표팀 주장 손흥민도 아낌없는 조언을 했다. 그는 카메룬과 경기를 마친 뒤 취재진과 인터뷰에서 "많은 팬들이 강인이를 보고 싶어 하셨을 거고, 나도 축구팬으로서 강인이가 대한민국 국가대표 유니폼을 입고 경기하는 것을 보고 싶다"고 말했다. 다만 "하지만 감독님도 그런 결정을 한 이유가 있으실 거로 생각한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손흥민은 "강인이만 경기를 뛰지 않은 건 아니다. K리그에서 잘하는 선수들도 분명 경기를 뛰고 싶어서 대표팀에 왔을 텐데 못 뛰게 돼 얼마나 실망했겠나"라며 "그런 상황에서 모든 집중이 강인이한테만 가면 강인이에게도 큰 상처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전했다.
그는 자신도 독일 분데스리가에서 활동할 당시 이강인과 똑같은 경험을 했다고 고백했다. 손흥민은 "나도 그 나이 때 매번 경기에 나서지 못했고, '분데스리가에서 잘하고 있는데, 뛰어야 하는데, 뛰고 싶은데'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고 회상했다. 그러면서 "이런 경험은 분명히 쌓인다. 강인이가 이런 부분을 통해 더 성장하고 더 좋은 선수로 발전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진심 어린 조언을 했다.
그러나 이강인은 의외로 의연한 모습을 보였다. 이강인은 카메룬과 경기가 끝난 후 "아쉽긴 하지만 제가 선택할 수 없는 거기 때문에 소속팀에 돌아가서 최고의 모습을 보여 드리려고 노력하겠다"는 말로 다음을 기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