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가난과 싸우다 아플 새도 없이 떠났다"... 세 모녀 사건 '청년 가장'의 비극

입력
2022.09.29 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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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전 루게릭병 사망한 수원 세 모녀 아들 
집세, 치료비, 부친 용돈... 20년간 가족 부양 
아들 숨진 뒤 생활고 극심, 안전망은 미작동
단란했던 가족 해체 유골함에 담긴 채 재회

지난달 21일 경기 수원시 다세대주택에서 세 모녀가 숨진 채 발견됐다. 9장짜리 유서에는 이들의 고통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60대 어머니는 암을, 40대 두 딸은 각각 희소병과 정신질환을 앓았다. 아버지는 빚만 남기고 수년 전 병사했고, 이후 생계를 책임진 아들도 2년 전 희소병으로 사망했다. 가족은 사실상 해체 상태였다.

아무리 그래도 성인 3명이 극단적 선택에 전부 동의한 건 선뜻 이해되지 않는다. 무엇이 한때는 단란했을 다섯 가족을 세상과 등지게 했을까. 답을 찾기 위해 경기 화성시 기배동으로 향했다. 기배동은 1만6,000명이 사는 작은 농촌마을. 세 모녀가 수원으로 이사 오기 전 오래 살았던 동네다. 주민등록상 주소지도 이곳이었다.

'수원 세 모녀' 아닌 '현수네 식구'

“현수네 식구들은 다 죽었는데, 왜 자꾸 이런 걸 보내는지...”

18일 기배동에서 만난 A씨는 비에 젖은 우편물 두 통을 기자에게 건넸다. 발신은 건강보험공단, 수신인은 이순애(가명). 순애씨는 수원 세 모녀의 어머니다. 편지를 대신 수령한 A씨는 세 모녀 주민등록 주소지의 실거주자다. 숨진 가족과는 오래전부터 알고 지냈다고 한다.

우편물은 18개월 연체된 건강보험료 35만 원을 내라는 독촉장과 이씨와 둘째 딸이 국민건강보험공단 암 검진 대상이라는 안내문이었다. 고지서 발행 날짜는 지난달 22일, 수원 세 모녀가 시신으로 발견된 지 하루 뒤였다.

세상은 엄마와 두 딸의 안타까운 죽음을 ‘세 모녀 사건’으로 명명했다. 그러나 A씨를 비롯한 기배동 주민들의 생각은 달랐다. 세 모녀 대신 꼭 “현수네 식구”라고 불렀다. 두 딸 중 현수란 이름은 없다. 현수는 2년 전 사망한 첫째 아들의 이름이다. 주민들은 “세 모녀 죽음도 비극이지만 현수가 더 안타깝다”고 했다. 가족을 위해 사십 평생 일만 하다가 세상을 떠난 현수씨의 인생에 더 주목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부잣집 아들에서 홀로 다섯 식구 부양

원래 세 모녀 가족은 대대로 물려받은 땅이 많아 기배동에선 손꼽히는 부자였다. 현수씨 아버지가 다리 난간을 제조하고 콘크리트를 시공하는 공장을 운영할 땐 남부럽지 않게 살았다. 현수씨와 친한 형·동생으로 지냈던 주민 B씨도 그 공장에서 일했다. 그는 “일손이 모자라 외국인 노동자들까지 데려다 쓴 적도 있었다”고 회상했다.

그러나 현수씨가 스물다섯 살이던 2001년, 모든 게 무너졌다. 회사가 부도나자 땅과 공장, 살던 집까지 채권자에게 넘어갔다. 아버지는 빚쟁이를 피해 종적을 감췄고, 세 모녀와 현수씨도 도망치듯 화성을 떠나 수원시 권선구 세류동에 터를 잡았다.

현수씨는 그때부터 집안 생계를 책임졌다. 큰 여동생이 수시로 발작을 하는 통에 어머니와 둘째 동생은 병간호만 하기에도 벅찼다.

가족이 지낼 방세와 생활비, 동생 치료비는 물론 가족을 떠난 아버지를 챙기는 것 모두 현수씨 몫이었다. 아버지는 트럭에 살림을 차리고 전국을 떠돌며 방랑생활을 했다. 그 트럭 역시 현수씨가 사줬다. 차량 유지비나 과태료 처리까지 도맡아 했다. 아버지에게 매월 40만 원씩 꼬박꼬박 용돈도 부쳤다. 현수씨는 새벽 5시에 일어나 밤늦게까지 택배 배달을 했다. 쉬는 날에도 각종 소일거리를 찾아 나섰다. B씨는 “겨울이 되면 함께 칡을 캐러 다녔다”고 말했다. 캐낸 칡으로 만든 즙을 지인들에게 팔아 살림에 보탰다고 한다.

가족은 작은 다세대주택에 살았다. 방 하나를 아픈 여동생한테 주고, 주방 겸 거실을 나머지 3명이 썼다. 셋이 겨우 몸을 누일 수 있는 비좁은 공간. 잠을 자다 화장실에라도 가고 싶으면 옆 사람을 다 깨워야 했다. 웬만해선 그냥 참는 버릇이 생겼다.

결혼도 현수씨에겐 사치였다. B씨는 “여자친구가 있었는데 잘 안 됐다”고 털어놨다. 한번은 A씨가 “결혼은 안 하느냐”고 묻자, 현수씨는 “나 같은 놈이 어떻게 결혼을 하느냐”면서 체념하듯 웃었다.

갑자기 찾아온 병마... 남은 가족 나락으로

20년 동안 죽어라 일만 했던 현수씨를 쉬게 해준 건 ‘루게릭병’이었다. 처음엔 희소병에 걸렸을 줄 상상도 못했다. B씨는 “멀쩡하게 걷다가 넘어져 일어나지도 못하길래 왜 그러나 싶었다”고 했다.

현수씨는 바로 병원을 찾지 않았다. 자신이 일을 안 하면 온 가족이 굶어 죽는 걸 알기에 아플 시간조차 없었다. 결국 2020년 초 6개월 시한부 선고를 받았다. 병세는 빠르게 악화했다. 목발을 짚고 10m를 채 걷지 못했다. 의사 진단이 나온 지 3개월도 지나지 않은 2020년 4월 그는 눈을 감았다. 몇 달 후 전국을 떠돌던 현수씨 아버지도 사망했다. 그렇게 세 모녀만 덩그러니 세상에 남았다.


보험 보상금에도 생계 역부족

현수씨는 운명을 예감한 듯 남은 가족을 위해 보험을 적지 않게 들었다. B씨는 “생활비가 부족해 일부를 해약하기도 했다”며 “세 모녀가 보험금을 받긴 했지만 액수가 크진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가장의 죽음 후 세 모녀는 수원 권선동으로 터전을 옮겼다. 어머니가 생계를 맡았지만 암이 재발해 일하기가 어려워졌다. 건보료를 16개월이나 연체할 만큼 금세 빈곤의 늪에 빠졌다. 이들은 끝내 아들ㆍ오빠 곁으로 가는 길을 택했다.

가족은 이별한 지 2년여 만에 유골함에 담긴 채 재회했다. 이달 20일 수원시와 화성시가 논의해 수원 연화장에 안치됐던 세 모녀 유골을 현수씨가 있는 화성시 추모공원으로 옮긴 것이다. 흰색 천에 싸여 추모공원으로 들어오는 세 모녀 유골함을 화성시 직원들이 맞았고, 화성시장과 시의원들이 조사와 추모사를 낭독했다.

“고인들이 걸어온 힘든 여정을 함께 하지 못했습니다. 너무 늦었지만 마지막 가는 길은 덜 외로웠으면 합니다.”

현수씨 가족의 죽음은 우리 사회에 많은 질문을 던진다. 꿈 많았을 20대 청년은 20년간 아등바등 가족의 생계를 홀로 책임지면서도, 왜 국가에 SOS(구조) 신호 한 번 보낼 수 없었을까. 위기 가구의 빈곤 추락을 막겠다며 마련된 긴급복지 지원제도는 벼랑 끝에 몰린 세 모녀를 왜 구하지 못한 걸까.

수원 세 모녀 이전에 2014년 ‘송파 세 모녀’가 있었다. 이들이 마지막 집세와 공과금을 남긴 채 극단적 선택을 한 사실이 알려진 뒤 온갖 대책이 쏟아졌다. 그러나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이번에도 특단의 조치를 되뇌는 말의 성찬이 난무하고 있다. 원인을 알아야 올바른 대책이 나온다. 획기적 변화가 없는 한 비극은 되풀이될 것이다.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너와 헤어져 돌아오는 눈 쌓인 골목길에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데 가난하다고 해서 두려움이 없겠는가 두 점을 치는 소리 방범대원의 호각 소리 메밀묵 사려 소리에 눈을 뜨면 멀리 육중한 기계 굴러가는 소리 가난하다고 해서 그리움을 버렸겠는가 어머님 보고 싶소 수없이 뇌어 보지만 집 뒤 감나무에서 까치밥으로 하나 남았을 새빨간 감 바람 소리도 그려 보지만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내 볼에 와 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돌아서는 내 등 뒤에 터지던 네 울음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 신경림 '가난한 사랑 노래' -




박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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