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16일 오후 7시 12분(현지시간). 미국 하와이주 빅아일랜드(하와이섬) 주민들의 휴대폰에 정적을 깨는 요란한 경보음이 울렸다. 화면에 뜬 메시지에는 이런 글이 적혔다. “앰버 경보- 하와이 경찰은 아나에호오말루 베이에서 마지막으로 목격된 미켈라 데비나를 찾고 있음. 위험에 처한 것으로 추정. 15세 여성, 갈색 머리에 검은색 비키니 상의, 꽃무늬 하의를 입었음.”
동시에 하와이 전역 텔레비전과 라디오에는 데비나의 사진과 함께 그를 찾는다는 방송이 송출됐다. 섬 곳곳의 고속도로와 거리 전광판에도 같은 내용이 나타났다. 24시간이 채 지나지 않은 17일 오후 4시, 경찰은 데비나를 구출하고 그를 흉기로 위협한 뒤 납치했던 던컨 마히(52)를 체포했다.
소녀를 무사히 구출할 수 있던 건 앰버 경보(AMBER Alert) 덕분이다. 용의자와 데비나가 외곽의 한 카페에 들어갔을 때, 얼굴을 알아본 직원과 손님들이 범인을 제압하고 경찰에 신고한 것. 현지 매체 하와이뉴스나우는 “데비나는 앰버 경보를 통해 그를 알게 된 생면부지의 사람들 덕에 안전하게 돌아올 수 있었다”고 전했다.
앰버 경보는 ‘미국 실종사건 방송 긴급 대응(America's Missing: Broadcasting Emergency Response)’의 약자다. 17세 미만 미성년자 납치 신고가 들어오면 경찰은 경보에 적합한지를 검토한 뒤 발령한다. 이후 데비나의 사례처럼 인근 지역 전파매체 등에 피해 어린이의 인상착의, 수배 차량과 차종, 차량 번호, 색깔 등 세부 정보가 공개된다.
△유괴범의 도주로를 차단하고 △심리적으로 압박하는 한편 △자세한 정보를 대중에 알려 공동체 전체가 어린이 구조와 용의자 체포에 나서는 시스템인 셈이다. 이를 통해 1996년부터 올해 5월 1일까지 26년간 1,114명의 아동이 살아 돌아왔다. 미국 법무부는 “일부 가해자는 앰버 경보를 들은 뒤 직접 납치된 아이를 풀어줬다”고 밝혔다.
그러나 처음부터 사라진 아동을 빠르게 찾는 시스템이 갖춰졌던 것은 아니다. 수많은 어린이들이 안전하게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던 배경에는 ‘실종사건 방송 긴급 대응’ 약자와 이름 철자가 똑같았던 앰버 해거먼(Amber Hagerman·1986~1996)의 안타까운 죽음이 있다.
1996년 1월 13일 오후 3시 18분. 미국 텍사스주 이스트 알링턴 외할아버지댁에 놀러 온 아홉 살 소녀 앰버가 사라졌다. 8분 전 “자전거를 타고 놀다 오겠다”며 나간 게 마지막이었다. 앰버는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아이의 흔적이 마지막으로 남은 곳은 집에서 두 블록 떨어진 곳에 위치한 버려진 식료품점 주차장. 그곳엔 앰버가 끌고 나간 분홍색 자전거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다행히 목격자가 있었다. 식료품점 맞은편 주택에 살던 노인 지미 케빌은 철조망 울타리 너머로 어두운 색 트럭을 타고 온 남성이 앰버를 자전거에서 끌어내려 차량에 강제로 밀어 넣은 뒤 떠나는 모습을 봤다고 경찰에 신고했다. 당시 아이가 비명을 지르며 납치범을 발로 차는 등 완강히 저항했지만 차는 순식간에 사라졌다고도 덧붙였다.
용의자는 검은색 머리를 가진 20·30대 백인 혹은 히스패닉계로, 신장 6피트(약 182.88㎝) 이하에 중간 정도 체격으로 알려졌다. 정황상 면식범은 아니지만 지역 지리에 밝은 자의 범행으로 추정됐다. 알링턴 경찰과 미 연방수사국(FBI)은 즉각 수사에 착수했다. 목격담을 토대로 차량 등에 대한 대대적인 검문검색이 시작됐다. 아주 작은 제보와 단서도 꼼꼼하게 훑으며 아이의 흔적을 찾아 나섰다. 제발 살아만 있길 바라면서.
그러나 희망은 절망으로 바뀌었다. 실종 나흘 뒤인 17일 늦은 밤, 앰버는 납치 장소에서 약 6.4㎞ 떨어진 아파트 단지 옆 개울에서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됐다. 옷은 벗겨져 있었고 몸에는 멍이 잔뜩 들어 있었다. 목에는 심하게 베인 상처가 선명했다. 부검 결과 소녀는 납치 이틀 뒤 숨졌고, 성폭행을 당한 것으로 드러났다.
더욱이 전날 폭우가 쏟아졌던 터라 시신과 현장에서는 용의자를 특정할 만한 뾰족한 증거도 발견되지 않았다. 결국 범인은 끝내 밝혀지지 않았고, 지금까지 행방이 묘연하다.
미국 내 아동 유괴, 피살 사건이 아주 드문 일은 아니다. 이 가운데는 수십 년간 범인을 찾지 못한, 이른바 ‘미제 사건(콜드케이스)’도 적지 않다. 그러나 앰버의 죽음이 26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건 해당 사건이 전 세계 실종아동 찾기에 한 획을 그었기 때문이다.
앰버가 숨진 채 발견되자 지역사회는 들끓었다. 대낮에 아이가 납치된 것도 충격이었지만 용의자가 아이를 유괴한 뒤 흔적도 없이 사라질 때까지 어른들이 별다른 손을 쓰지 못했던 데 대한 분노와 좌절도 컸다.
특히 지역 사회에서는 구멍난 초기 대응 시스템에 대한 비판 목소리가 높았다. 격분한 시민들은 지역 방송국에 불만을 토로했다. 텍사스 주민 다이애나 사이먼 등 일부 시민들은 참사 반복을 막기 위해 경찰에 아동 납치 사건이 신고되면 방송국에서 즉시 상황을 대중에 공유하는 방식을 제안하기도 했다.
7월에는 한 미디어 심포지엄에서 유괴·실종 사건 발생 시 목격 정보를 시민들에게 알리는 시스템을 구축하자는 아이디어가 보다 구체화했다. 사건 발생→경과→결말을 언론을 통해 신속하게 공개하자는 데 뜻이 모였다.
몇 달 뒤 시민들의 바람은 현실이 됐다. 같은 해 10월 텍사스주 댈러스-포트워스 방송국은 지역 경찰과 손잡고 앰버와 유사한 사건이 발생했을 때 관련 정보를 텔레비전과 라디오, 도시 전광판을 통해 시민들에게 즉각 알리는 조기 경보 시스템, ‘앰버 경보’를 공식 구축했다.
이후 해당 시스템은 점차 다른 주로 퍼졌고, 2003년 4월 연방의회에서 법으로 제정되면서 미 전역에서 의무가 됐다. 현재는 세계 31개국으로까지 확산한 상태다. 한국은 2007년 아시아 최초로 앰버 경보를 도입했다.
한 소녀의 비극적 죽음이 세계 각국 아동 수천 명에게 희망의 빛을 선물한 셈이다. 미국 실종아동찾기 홈페이지(missingkids.org)는 “앰버 사건은 실종 아동을 찾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꿔 놓았다”고 평가했다. 앰버의 어머니 도나 윌리엄스는 “딸의 죽음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은 또 다른 유산”이라며 “앰버 경보는 아이들의 생명을 구했다. 나는 딸이 아이들을 위해 한 일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사건 수첩은 아직 닫히지 않았다. 26년이 지났지만 앰버의 가족과 경찰은 지금까지도 용의자를 찾고 있다. 빛나는 웃음을 짓던 아이는 세상에 없지만, 소녀를 잔혹하게 살해한 악마는 꼭 체포해 단죄해야 한다는 일념, 단 하나로 말이다. 앰버가 떠난 지 꼭 25년째 되던 지난해 1월 14일, 알링턴 경찰은 이렇게 밝혔다.
“7,000건이 넘는 제보를 받아 샅샅이 뒤졌지만 살인자를 찾는 데 필요한 증거를 찾지 못했다. 사건은 지금까지 열려 있다. 아직 우리에게 말하지 않은 것을 알고 있는 누군가가, 앰버의 어머니에게 ‘마지막 이야기’를 해주기를 바라고 있다. 제보 전화 817-575-88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