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성 없는 검찰, 재심 사건에 무기징역 구형... 법원은 "불법 수사 무죄"

입력
2022.09.27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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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기래 선생, 통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옥살이
유족들 재심 청구... "박정희 정권의 불법수사"
재판부 "불법 인정, 법정 진술 자유롭지 않아"
유족들 "검찰 반성해야... 명예회복 법원 감사"

'통일혁명당(통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사형 선고를 받았던 통일운동가 고(故) 박기래 선생이 재심 끝에 명예를 회복하게 됐다. 재심 재판부는 박정희 정권 수사기관의 가혹행위를 인정해 박 선생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박 선생 유족은 "공안 재심사건에서까지 무기징역을 구형한 검찰은 사과해야 한다"고 비판했다.

서울고법 형사12-1부(부장 김길량)는 27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고 옥살이를 했던 박 선생의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박 선생은 1975년 '통혁당 재건위 사건'을 주도한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박 선생이 공산주의를 설립 이념으로 삼는 통혁당 재건 운동을 벌이는 등 간첩행위를 했다는 이유였다. 통혁당 재건위 사건은 인혁당(인민혁명당) 재건위·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 사건과 함께 1970년대 대표적 공안 사건으로 꼽힌다. 박 선생은 두 차례 감형을 받은 끝에 1991년 가석방됐다. 출소 이후에는 통일 운동에 매진하다가 2012년 세상을 떠났다.

박 선생의 유족은 2018년 서울고법에 재심을 청구했다. 유족 측은 "박정희 정권의 보안사령부가 박 선생을 영장 없이 체포하고, 수사과정에서도 폭행과 고문을 일삼았다"고 주장했다. 서울고법도 이를 받아들여 2020년 재심 개시를 결정했다.

검찰은 그러나 40년 전과 다르지 않았다. 재심 사건에서도 무기징역을 구형한 것이다. 검찰은 "박 선생의 법정 증언은 자유롭게 이뤄졌다"며 "공판조서 등에 기재된 진술 내용을 거짓이나 조작이라고 치부하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유족들은 "수사기관에서 고문 등으로 허위자백을 했을 경우 법정에서의 자유로운 심리상태를 인정하지 않고 진술 신빙성을 기각한 사례가 많이 있다"고 반발했다.

재심 법원은 유족 측 손을 들어줬다. 재판부는 "수사기관의 가혹행위가 인정되기 때문에 박 선생의 피의자 신문조서 등 유죄 증거를 받아들일 수 없다"며 "박 선생의 법정 진술 당시 수사 단계부터 이어진 심리적 압박이 해소됐다고 단정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박 선생이 공소장과 1심 판결문을 살펴보지 못하고 재판을 받았고 △공동 피고인들이 항소·상고이유서에 수사기관의 불법 구금을 호소한 사실 등도 무죄 근거가 됐다.

재판부는 "기록 검토가 늦었다"며 이례적으로 선고가 연기된 것을 사과하기도 했다. 재판부는 지난해부터 박 선생에 대한 선고를 세 차례나 미뤘다.

유족 측은 선고 직후 검찰의 반성을 촉구했다. 박 선생의 큰아들 창선씨는 "간첩단의 자식이란 오해 때문에 받은 고통을 법원이 헤아려줘 감사하다"며 "별다른 근거도 없이 무기징역을 구형한 검찰은 사과하고, 판결에 불복하지 말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박 선생의 아내도 "남편이 이제라도 명예가 회복돼 다행이다"고 밝혔다.

박준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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