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ㆍ달러 환율이 13년여 전 금융위기 이후 최고 기록을 연일 갈아 치우고 있지만 아직 과거 같은 위기는 아니라는 것이 정부의 평가다. 객관적으로 측정된 원화의 실질 가치가 여전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상승 폭이 워낙 급한 데다 미국처럼 공격적으로 금리를 올리기 힘든 형편인 만큼 정부가 위기감을 갖고 최선을 다해 방어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26일 기획재정부에 따르면, 올 7월 현재 한국의 실질실효환율은 101.4다. 국제결제은행(BIS)이 집계하는 실질실효환율은 각국 통화의 실질적인 구매력을 보여주는 지표로, 기준 시점인 2010년 수준을 100으로 잡고 현재 시점 수준의 비교가격을 산출하는 방식이다. 수치가 100을 넘으면 고평가, 100에 미치지 못하면 저평가된 것으로 간주한다. 그렇기 때문에 실질실효환율이 101.4를 기록했다는 것은, 실제 원화 가치가 환율 상승으로 명목상 추락한 정도만큼 떨어지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신현송 BIS 수석 이코노미스트 겸 조사국장이 최근 기자회견에서 “실질실효환율상 통화가 강해진 나라에 한국도 포함된다”고 진단하기도 했다.
다른 선진국 통화와 비교하면 원화의 선방은 더 두드러진다. 잇단 기준금리 대폭 인상으로 달러 강세를 부추기고 있는 미국의 실질실효환율(129.7)이 크게 고평가된 반면 유럽(90.1)과 일본(58.7)은 기준 연도 수준을 한참 밑돌았다.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전날 방송에서 “원화 가치만 떨어졌던 과거 1997년 외환위기나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의 양상과는 확연히 다르다”고 자신 있게 강조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근거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 상황이 아슬아슬한 것도 사실이다. 8월 이후 환율 상승 폭은 점점 더 가팔라지고 있다. 22일 심리적 마지노선으로 여겼던 1,400원 선이 뚫리더니 이날은 하루 만에 20원 넘게 급등하며 1,430원 벽마저 무너졌다. 이런 ‘쏠림’ 현상은 물론 정부도 주시하고 있다.
문제는 대응 수준이다. 특히 금리에 대한 태도가 그렇다. 1,900조 원에 육박하는 가계부채와 경기 침체 가능성을 지나치게 의식한 나머지 ‘금리 역전(한국 기준금리가 미국보다 낮은 현상)’ 해소 대신 일단 달러 수급 조절로 문제를 해결해 보겠다는 게 현재 외환당국의 입장이다. 그러나 충분하지 못하다는 시각이 적지 않다. 국내 투자 자금이 빠져나가 환율이 더 치솟을 수 있고, 그러면 인플레이션에도 속수무책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국가적 위기에 편승한 달러 투기를 막을 대책도 필요하다는 조언이다. 김용범 전 기재부 제1차관은 최근 페이스북 글을 통해 “지금과 같이 심리가 중요한 시기에 내국인이 제일 발 빠르게 자국 통화 약세에 베팅하는 길이 너무나도 쉽고 무제한으로 열려 있다는 것은 재고해 볼 필요가 있다”며 환투기를 적절히 제한하지 않는 당국에 일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