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서대문구 역세권에 자리한 A아파트는 인근 부동산에 매물이 20여 개 쌓여 있지만 약 절반은 1년 가까이 주인을 찾지 못했다. 다만 같은 면적인데도 매물 가격 차이가 크다. 매도가 급한 집주인 일부가 가격을 크게 낮추면서 많게는 2억 원가량 벌어진 것이다. 1년 전 7억5,000만 원(전용면적 79㎡)에 나온 매물은 6개월 전 7억 원으로 조정됐다가 최근 6억 원까지 호가를 낮췄다.
인근 부동산 관계자는 "안 급한 집주인이야 최근 시장 상황을 덤덤히 지켜보고 있지만 이사 등이 맞물려 매도가 급한 집주인은 급급매 수준으로 가격을 낮추고 있다"며 "그래도 거래가 안 돼 울며 겨자 먹기로 전세로 돌린 경우도 있다"고 귀띔했다.
정부가 부동산 규제를 잇따라 풀고 있는데도 집값 하락은 가팔라지고 있다. 경기 침체에 금리 인상까지 예고되며 시장 분위기가 꺾이자, 주택시장에서 가격대를 대폭 낮춘 '급급매' 매물이 속출하면서다. 급급매 위주로만 거래가 이뤄지면서 집값 상한 역시 계속 낮아지고 있는데, 대단지 아파트가 몰려 있는 서울 송파구 잠실동 아파트는 최근 심리적 저항선으로 여겨지는 20억 원 선까지 깨졌다.
요즘 주택시장은 '빙하기'란 말이 딱일 만큼 집을 팔 사람은 넘쳐나는데 반대로 살 사람은 아예 자취를 감췄다. 지난주 서울 아파트 매매수급지수(부동산원)는 79.5를 기록, 80선이 무너졌다. 100보다 낮으면 시장에 집을 팔려는 사람이 사려는 사람보다 많다는 걸 의미한다. 지난주 지수는 2019년 6월 넷째 주(78.7) 이후 3년 3개월 만에 가장 낮은 것이다. 1년 전만 해도 서울의 매매수급지수는 100을 웃돌아 급매물이 귀한 대접을 받은 반면, 최근엔 급급매도 비싸다는 인식이 생길 만큼 시장 분위기가 급변했다.
경기 침체, 추가 금리 인상 우려와 같은 악재가 수두룩하다 보니 이른바 '1급지'로 통하는 서울 주요 지역도 가격 방어가 어려운 상황이 됐다. 송파구 잠실동 잠실엘스 전용 84㎡는 지난달 27일 19억5,000만 원(7층)에 거래됐다. 지난해 10월 최고가(27억 원·14층)보다 7억5,000만 원 떨어진 것이다. 2019년 말 이 아파트 전용 84㎡는 잇따라 실거래가가 20억 원을 돌파해 '20억 클럽'에 이름을 올렸는데, 다시 2년 전으로 돌아가는 모습이다. 최근에 나온 매물도 20억 원 수준으로 한 달 전 실거래된 가격보다 2억 원가량 낮다. 서울을 포함해 지난주 전국 주간 아파트 매매가격은 전주보다 0.17% 하락, 2012년 통계 작성 이래 하락 폭이 가장 컸다.
정부는 주택 거래가 실종되고 집값 하락도 가팔라지자 최근 규제지역을 대폭 해제하는 등 시장 연착륙에 나섰다. 그러나 집값 하락은 계속될 전망이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21일 3번 연속 자이언트 스텝(기준금리 0.75%포인트 인상)을 밟으면서 한국은행 역시 내달 금리를 또 한번 큰 폭으로 올릴 것으로 점쳐진다. 이미 시중은행 주택담보대출 금리 상단은 7%를 눈앞에 둔 상황이라 매수세는 더 쪼그라들 수밖에 없다.
서울 강남의 한 중개업소 대표는 "급급매가 계속 더 늘어나면 집값은 더 내려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정부 고위관계자는 "서울 등 수도권 지역은 여전히 집값이 높아 정부로서도 더 내려가야 한다는 판단이 있다"며 "집값 하락을 방어하기 위해 규제를 풀지는 않을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