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가 죽였다." "나라가 공범이다."
서울 지하철 2호선 신당역 스토킹 살해 사건 이후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라온 분노는 하나의 질문에 가 닿는다. "또 한 명이 무참히 희생되기까지 우린 지금껏 무얼 하고 있었나."
흉기에 찔린 채 숨이 다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비상벨을 누르며 도움을 요청했던 피해자는 끔찍한 범죄에 결코 굴하지 않았다. 몰래 불법촬영을 하고, 이를 미끼로 협박하고, 만남을 강요하고 3년 넘게 지속적으로 스토킹하며 괴롭혀온 피의자 전주환을 두 차례나 고소, 법의 처벌을 촉구하며 맞섰다. 피해자가 할 수 있는 모든 조치였다. 하지만 대한민국 공권력은 피해자의 호소를 끝끝내 들어주지 못했다.
"피의자를 빨리 구속했더라면." "긴급응급조치로 피해자와 피의자를 적극 분리시켰더라면." 뒤늦은 한탄은 "이제는 바꿔야 한다"는 절박한 외침으로 바뀌고 있다.
△가해자 처벌은 솜방망이에 그치고, 피해자 보호는 손 놓고 있는 허술한 법 체계 △스토킹 범죄 심각성에 눈감아 버리는 안일한 사법당국 △일방적 폭력을 적극적인 구애 행위로 치부하는 그릇된 사회적 인식 등을 다 뜯어고치지 않는 한, 제2의 신당역 사건은 또다시 나타나 언제든, 누구든 위협할 수 있다.
두 번 다시 없어야 할 비극을 막기 위해 어떤 법과 제도가 정비되고 만들어져야 하는지 각계 전문가들이 언론 인터뷰 등을 통해 내놓은 여러 대안들을 정리해봤다.
전문가들은 우선 "스토킹 범죄 가해자에게 관대해도 너무 관대한 법"이 문제라고 입을 모은다. 지난해 3월 '스토킹처벌법'이 첫 발의 22년 만에 국회 문턱을 넘었지만, 법 자체가 헐거운 데다 허술한 법마저 실효성 있게 작동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법은 만들어졌을 때부터 허점투성이였다. 대표적인 건, '반의사불벌' 조항. 한마디로 피해자와 합의만 하면 사건은 언제든 없던 일이 될 수 있다는 얘기다. 피해자가 가해자로부터 합의를 계속 종용받는 2차 가해가 뻔히 우려된다는 점에서, 입법 초기부터 반드시 없애야 할 독소조항으로 꼽혀 왔지만, 살아남았다.
후과는 컸다. 실제 스토킹처벌법 시행(2021년 10월 21일) 이후 최근까지 기소된 사건 237건 중 공소기각된 사례는 81건. 가해자 10명 중 3명 이상은 재판 중 면죄부를 받는다는 뜻이다. 스토킹범죄를 막겠다고 만든 법 때문에 스토킹 범죄 피해를 되레 키우는 경우도 빈번하다. 당장 이번 신당역 스토킹 살해 사건도 사건 무마 합의를 목적으로 피해자에 대한 스토킹 범죄를 멈추지 못하다가 앙심을 품고 '보복 범죄'로 이어진 패턴이었다.
전문가들 사이에선 스토킹 범죄의 경우 △반의사불벌 조항 폐지와 함께 △의무 체포와 의무기소를 명시해 수사기관의 재량을 축소할 필요가 있다는 제안이 나온다.
스토킹처벌법에 규정된 스토킹 범죄 개념을 포괄적으로 넓혀야 한다는 목소리도적지 않다. 현행 법은 '상대방의 의사에 반해서 정당한 이유 없이 상대방에게 불안감이나 공포심을 일으켜야 한다'는 전제하에, 접근하거나, 따라다니거나, 주거·직장에서 기다리는 등 5개 행위에만 범죄 행위를 적용해 구체적으로 나열하고 있는데 규정이 협소해 사이버 스토킹 등 새롭게 전개되는 범죄 행위를 따라가지 못한다는 지적이다. 스토킹 범죄 특성상 피해자의 범위를 당사자뿐 아니라 가족 및 동료 등 주변 지인으로 확대해 보호를 강화해야 한다는 의견도 새겨볼 만하다.
솜방망이 처벌도 반드시 개선돼야 할 부분이다.
스토킹처벌법의 구형은 징역 3년 이하 또는 벌금 3,000만 원 이하, 흉기를 소지했다면 징역 5년 이하 또는 벌금 5,000만 원 이하에 처하도록 정하고 있지만 유죄 판결을 받더라도 감옥에 가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수치로 보면, 스토킹법으로 최근까지 선고가 난 156건 가운데 집행유예는 76건, 벌금형 41건, 스토킹법 위반 혐의로만 실형이 나온 건 4건에 불과했다. 나머지 실형이 선고된 35건은 협박이나 폭행 등 다른 범죄와 함께 재판에 넘겨진 경우다.
전문가들은 스토킹 범죄가 중범죄라는 사회적 인식이 미약한 상황에서, 강력한 처벌로 경각심을 일깨울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스토킹법을 먼저 도입한 외국 사례도 참고할 필요가 있다. 1997년 괴롭힘방지법을 제정한 영국에서 스토킹은 최대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을 수 있는 중범죄다.
우리보다 20년, 30년 앞서 스토킹처벌법을 도입한 미국 일본 독일 등도 진화하는 스토킹 범죄를 근절하고자 발빠르게 대응하고 있다. 온라인 스토킹 등으로 범죄 범위를 넓히고, 피해자가 미성년자일 경우 가중처벌에 나서는 등 형량도 강화해나가는 추세다.
보복범죄 우려가 큰 스토킹범죄 특성을 감안해 구속수사도 강화시킬 필요가 있다. 경찰청에 따르면 스토킹법 위반으로 입건된 3,039명 중 구속된 비율은 4.3%(129명)에 불과했다. 전문가들은 구속영장 신청 발부 사유에 △'피해자 위해 가능성'(보복우려) 등을 고려해 보완하는 방안과 △'조건부 석방제'도 대안으로 꼽고 있다.
'조건부 석방제'는 구속영장 단계에서 법원이 활동 반경을 제한하거나 위치추적 전자장치 부착, 피해자 접근 금지 등 일정 조건을 달아 피의자를 석방하되, 이를 어길 경우 구속하는 것으로 능동적인 공권력의 개입과 감시가 가능해진다는 점에서 피해자와 가해자를 분리시키는 데 효과를 볼 수 있다.
피해자 보호를 위한 제도적 장치 마련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먼저 거론되는 건 '피해자 보호명령 제도'다. 스토킹 피해자가 수사기관을 거치지 않고도, 법원에 직접 신청해 보호받을 수 있는 장치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선제적 분리를 위해 현행 스토킹처벌법에 규정해놓은 응급조치, 긴급응급조치, 잠정조치를 경찰이 적극 발동하는 것도 방법이다.
특히 전문가들은 가장 효과가 크지만 까다로운 절차 탓에 유명무실한 잠정조치 4호(유치장 구금)를 적극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한다. △경찰 직권으로 시행 △유치 시설 확대 △분리 기간 한달 이상 확대 △위반 시 처벌 강화 등이 그 전제다.
피해자 보호 지원에 대한 체계적이고도 종합적인 법률도 필수다. 국회에 계류돼 있는 '스토킹 피해자 보호 및 지원에 관한 법률안'(정춘숙 더불어민주당 의원 대표발의)이 이미 밑그림을 그려놨다. △스토킹 범죄 예방 방지를 위한 국가 차원의 실태조사 및 교육 실시 △스토킹 피해자에 대한 취학, 취업, 법률, 주거, 의료, 생계, 안정, 유급휴가 등 지원 △스토킹 피해자 지원센터 설치 운영 등이 골자다.
사실 법과 제도보다 더 크게 바뀌어야 하는 건, 스토킹 범죄에 대한 사회의 그릇된 인식이다.
"좋아하는데 안 받아줘서"라는 망언이 공개 자리에서 튀어나올 만큼, 우리 사회는 스토킹을 범죄 자체로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이 같은 '의도적 무지, 의도적 무시'가 횡행하는 데는, 여전히 공고한 남성 중심의 권력 구조를 빼놓고 원인을 찾기 어렵다. 그런 점에서 "여성혐오 범죄냐, 아니냐"로 따지며 젠더 폭력 범죄를 '남녀 갈라치기 프레임'으로 접근, '선제적 물타기'에 나선 여성가족부 장관의 발언은 매우 부적절했다는 지적이다.
분명한 건, 성차별적 위계 구조를 허물지 못한다면, 아무리 법과 제도가 잘 정비되더라도 스토킹 범죄는 계속 반복될 것이란 점이다. 마지막 순간 피해자가 목숨 걸고 눌렀던 비상벨은 '국가가 더 이상의 무고한 죽음은 막아달라'는 절규이지 않았을까. 이제는 우리 모두가 그 비상벨에 응답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