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같은데 월급 적고 승진도 봉쇄... '울화통' 무기계약직

입력
2022.09.29 04:30
15면
무기계약직, 공공·민간 140만 명+α
2019년 대법원 "무기계약직 차별 말라" 판단
업무 동일성·취업규칙 유무 따져봐야

편집자주

월급쟁이의 삶은 그저 '존버'만이 답일까요? 애환을 털어놓을 곳도, 뾰족한 해결책도 없는 막막함을 <한국일보>가 함께 위로해 드립니다. '그래도 출근'은 어쩌면 나와 똑같은 문제를 겪고 있는 노동자에게 건네는 전문가들의 조언을 담습니다.


지송이는 정직원 전환의 기회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계약직처럼 최대 2년의 근무 연수 제한이 있는 것도 아닌, 일종의 무기계약직인 것 같았다. 똑같은 사무실에서 똑같이 일했고 똑같이 야근도 했고 휴가도 똑같이 받았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있었다. 같은 연차의 다른 직원들보다 급여가 현저히 낮았고, 상여금이나 성과급에서도 제외됐다.
장류진 장편소설 '달까지 가자' 중.


이 소설에서 제과회사 절친 3총사 중 정직원인 다해, 은상과 달리 지송은 무기계약직이다. 이 사실을 뒤늦게 안 다해에게 지송은 "대리가 되더라도, 부장 달아도 언니라고 부르고 싶다"고 말했다. 지송이 이어 "그때까지 내가 회사에 다니고 있겠느냐"고 묻자 다해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정규직에 일 가르치고, 업무는 더 많고"

소설 속 이야기는 지어낸 픽션이지만 현실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하다. 겉보기엔 정규직과 다를 바 없지만 월급은 적고 승진 기회도 없는 무기계약직의 실제 삶은 어떨까.

# 한 국립대학의 자연과학부 행정실에서 10년째 정교수 선발 등 장학 업무를 하는 무기계약직 A씨. 그는 같은 업무를 하면서 정규직인 국립대 법인 소속 직원이 3년 주기의 순환 보직 때마다 머리가 지끈거린다. 새로 배치받은 법인 직원을 일일이 가르쳐야 하고, 주요 업무는 자신에게 몰리는 일이 반복됐기 때문.

법인 직원과의 임금 차이를 생각하면 더 울화통이 터졌다. A씨 사업주 격인 단과대학의 월급 체계는 법인과 처음부터 다르고, 재정도 훨씬 열악해 업무는 똑같아도 임금이 적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그나마 이과 계열은 낫다. 예산이 부족한 인문대 무기계약직은 급여는 물론 건강검진, 명절 상여금 등 복지 하나하나가 뒤처진다"고 말했다.

# 공공부문 무기계약직을 의미하는 공무직 노동자 B씨는 정부 부처 산하기관에서 사무직원으로 15년째 근무 중이다. 베테랑 칭찬을 듣지만 얼마 전 옆 부서 동료로 업무가 거의 비슷한 9급 공무원 직원의 8급 승진은 겉으로만 축하해줬다. '일은 내가 더 많이 하는데...'

B씨는 공무직이란 이유로 공무원처럼 진급이 봉쇄됐다. 그동안 착실히 준비했던 공무원 전환 시험도 당분간 소용없어진 것 같다. 그는 정부가 바뀌면서 정원을 줄이는 마당에 공무직이 공무원으로 올라갈 길은 사실상 막혔다"고 토로했다.

비정규직처럼 보호도 못 받는 사각지대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중간이라는 의미에서 '중규직'으로 불리는 무기계약직이 노동시장에서 주된 고용 형태로 자리 잡은 건 2000년대 중후반이다. 사업주는 비정규직을 2년 이상 고용하면 무기계약직으로 전환하고 고용을 보장해야 한다는 기간제법이 2007년 7월 도입되면서다. 그때부터 2년 이상 근무해 무기계약직으로 전환한 비정규직은 물론, '달까지 가자'의 지송이처럼 무기계약직을 신입으로 채용하는 회사도 하나둘 생겼다.

중앙·지방정부, 공공기관, 학교 등에서 일하는 무기계약직(공무직)은 40만 명 안팎으로 알려졌다. 특히 문재인 정부에서 강력 추진한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정책으로 무늬만 정규직인 무기계약직이 크게 증가했다. 민간 부문 무기계약직은 공공 부문보다 많은 100만 명 이상으로 추산된다.

무기계약직의 고충은 정규직인 듯 정규직이 아닌 애매한 고용 형태에서 비롯된다. '평생 직장' 개념이 강한 한국 사회에서 무기계약직이 사실상 정년까지 일할 수 있는 점은 정규직과 가깝다. 하지만 급여 체계, 복지 등 회사 생활을 하면서 받는 대접이 정규직과 다른 건 비정규직과 닮았다.

사업주 측 얘기부터 들어보면 정규직과 무기계약직을 차이 두는 건 불가피하다고 본다. 무기계약직을 애초 정규직과 다른 업무 인원으로 뽑았고, 채용 절차도 상대적으로 간소한 점을 감안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예컨대 은행 창구에 나란히 앉은 직원은 고객 입장에선 다 같은 은행원이지만 무기계약직, 정규직이 섞여 있다. 이를 두고 금융권 관계자는 "은행 무기계약직은 저임금 직군으로 표현하는데 사무, 영업이 주 업무인 반면 정규직은 창구 업무 외에 대출 심사, 기업 평가, 외환까지 모든 은행 일을 한다"며 "저임금 직군은 채용 경로도 정규직과 달라 그에 따른 임금을 받는 것"이라고 말했다.

'다른 노동, 다른 임금'으로 요약되는 금융권의 설명은 일리 있다. 하지만 앞선 사례의 국립대 무기계약직, 공무직 노동자처럼 정규직과 무기계약직 간 업무가 별 차이 없다는 현장 목소리도 적지 않다. '동일 노동, 동일 임금'이란 노동시장의 대원칙이 흔들리고 있는 셈이다.

의미 있는 변화는 있다. 대전MBC에 기간제로 입사해 무기계약직으로 전환한 카메라맨, 미술감독 등은 정규직과 같은 업무를 하면서 기본급, 상여금을 정규직의 80%만 받고 있어 차별 시정 소송을 2013년 냈다. 이를 놓고 2심 재판부는 하는 일이 같더라도 임용 경로, 업무 책임이 달라 정규직과 무기계약직 간 처우 격차는 인정돼야 한다는 취지로 판결을 내렸다.

흔들리는 '동일 노동, 동일 임금'

하지만 2019년 12월 최종심인 대법원은 정반대 판단을 했다. 대법원은 "동일한 부서 내에서 같은 직책을 담당하며 동종 근로를 제공하는 정규직 직원에게 적용되는 대전MBC의 취업규칙에서 정한 근로 조건은 무기계약직 노동자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고 봐야 한다"고 판시했다. 무기계약직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국가인권위원회는 2021년 12월 정부에 공무직 직원의 임금·수당 기준을 합리적으로 마련하라고 권고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무기계약직이 차별 대우를 해소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대법원 판결을 따르면 무기계약직의 주된 업무가 정규직과 같다고 입증하는 게 중요하다. 일부 업무는 달라도 주된 업무가 같으면 정규직과 무기계약직 간 급여, 수당, 복리 후생 등을 차이 두는 행위는 차별로 볼 수 있어서다.

무기계약직이 따로 회사와 합의한 취업규칙이 있는지도 따져봐야 한다. 대전MBC 무기계약직은 무기계약직용 취업규칙이 없기 때문에 정규직 취업규칙을 적용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대법원이 이를 받아들였다. 무기계약직만의 급여, 복리 후생 등을 명문화한 별도의 조항이 없다면, 정규직 취업규칙대로 대우해 달라고 사측에 요구할 만하다는 얘기다.

무기계약직 문제는 같은 처지에 있는 동료가 많은 만큼 개별적으로 풀기보다 노동조합 등 집단의 힘을 활용할 필요도 있다. 민주노동조합총연맹 노동법률지원센터 소속인 최진수 노무사는 "무기계약직은 정규직은 물론 비정규직 보호법으로부터도 보호받지 못하는 고용 형태"라면서 "무기계약직이 개인적으로 회사에 고충을 얘기해도 사측은 압력을 못 느낄 것이라 조직화된 목소리를 통해 교섭력을 높여야 한다"고 말했다.

서울대에서 정규직과 무기계약직 간 차별을 시정해달라는 소송을 진행 중인 송호현 대학노조 서울대지부장은 "대전MBC 판결 이후에도 전혀 변화가 없는 게 현실"이라며 "정규직 노조가 자신들의 파이를 빼앗긴다면서 오히려 억누르는 현실을 감안하면 자신의 이익을 대변하는 노조가 어디인지도 잘 살펴봐야 한다"고 말했다.

세종= 박경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