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20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와의 전쟁에 예비역 30만 명을 소집했다. 러시아가 출구전략을 찾는 대신 확전을 결정하면서 전쟁이 장기화하고 우크라이나·러시아인들이 더 많은 피를 흘릴 수밖에 없게 됐다.
러시아는 올해 2월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서 국제법적 명분을 확보하기 위해 '전쟁' 대신 '특수군사작전' 용어를 썼다. 이에 총동원령이나 계엄령을 내리지 않고 직업 군인만 참전시켰으나, 이달 들어 전세가 악화하자 민간인에 대한 부분적 동원령을 내린 것이다.
이어 푸틴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동부 친러시아 지역인 돈바스(도네츠크인민공화국과 루한스크인민공화국)를 되찾겠다는 의지를 재확인했다. 게임 체인저로 핵무기를 쓸 가능성도 재차 열어 두었다.
푸틴 대통령은 사전 녹화해 방송한 대국민연설에서 "러시아와 러시아의 주권, (영토적) 통합성 보호를 위해 부분적 동원을 추진하자는 국방부와 총참모부의 제안을 지지한다"며 부분 동원령에 서명했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군 경험이 있는 30만 명이 훈련을 거쳐 전투에 투입된다. 병력뿐 아니라 군수 물자의 부분적 강제 동원도 이뤄질 전망이다.
러시아의 기대와 달리 우크라이나가 오래, 강하게 버티면서 러시아군은 7만~8만 명(미국 비공식 추산)의 병력을 잃었다. 병력 손실로 최근 러시아군은 우크라이나 동북부 하르키우 지역에서 패퇴하고 남부 헤르손에서 밀리기 시작했다.
이에 러시아는 민간인 희생을 감수한 병력 확충으로 장기전 대비를 시작한 것이다. 러시아 하원(국가두마)은 20일 전투를 거부하거나 상관의 명령에 불복하는 병사를 최대 징역 10년에 처하는 형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푸틴 대통령은 핵 버튼을 누를 수 있음을 거듭 시사했다. 그는 러시아에 핵무기를 사용할 수 있다고 발언한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NATO) 주요국 인사들을 언급하며 "그들이 핵 위협을 가하고 있으나, 러시아도 다양한 파괴 수단을 갖고 있음을 상기시키고 싶다"고 말했다. 이어 "러시아의 영토적 통합성이 위협받으면 우리는 모든 수단을 사용할 것"이라며 "이는 허풍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병력 문제를 일단 틀어막은 푸틴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점령지의 러시아 귀속 강행에 속도를 낼 것으로 보인다. 친러시아 반군 세력이 전쟁 전부터 장악한 우크라이나 동부 도네츠크와 루한스크, 새로 점령한 남부 자포리자와 헤르손 등 4개 주에서 러시아 병합 찬반 주민투표가 이달 23~27일 실시된다. 러시아는 같은식으로 절차적 정당성을 확보한 뒤 크림반도를 차지한 바 있다.
점령지를 러시아 영토로 삼은 뒤 이 지역에 대한 우크라이나의 공격과 서방의 무기 지원을 '러시아 본토 침략'으로 규정하겠다는 것이 러시아의 속내다.
푸틴 대통령은 이번 전쟁을 러시아와 서방의 대결로 확대하려 하고 있다. 그의 연설 직후 세르게이 쇼이구 러 국방장관은 "러시아는 서방 집단과 전쟁을 벌이고 있다"고 말했다. 러시아 관영 러시아투데이(RT) 편집장 마르가리타 시몬얀은 "러시아 영토로 편입된 점령지가 공격받으면 러시아와 나토 간의 전쟁이 될 조건이 모두 갖춰지게 된다"고 말했다.
부분 동원의 실효에 대해선 회의적 시각이 많다. 예비역이 수개월간 군사훈련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전투에 즉각 투입하기 어렵다고 영국 BBC방송은 보도했다. BBC는 "군 경험이 있는 예비역이라도 전투 부대로 새로 조직하는 데는 몇 달이 걸린다"며 "러시아의 치명적 자원 손실을 감안하면, 전투에 장비를 제공하는 데도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고 전했다.
예비군 동원은 국내 정치적으로 상당한 리스크다. 전쟁 공포가 확산하면 여론 악화가 불가피하다. 반정부 시위가 일어나 푸틴 대통령의 장기 집권 체제가 위협받는 것은 최악의 시나리오다.
미국 워싱턴포스트는 "(부분 동원령은) 푸틴 대통령의 선택지가 얼마나 축소되고 있는지 보여준다"고 꼬집었다. 우크라이나는 "전쟁이 러시아의 계획대로 돌아가지 않는 점을 분명히 보여주는 예견된 수순"(미하일로 포돌랴크 대통령 보좌관)이라고 일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