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따' 푸틴, 중국·인도 이어 동남아에도 손절?… "챙겨 줄 게 없다"

입력
2022.09.21 04:30
필리핀 러시아제 헬기 구매 계약 파기
아세안 무역 규모도 미국이 러의 20배
"동남아가 제재 위반 감수할 이유 없어"

러시아가 든든한 우군이라 믿었던 중국과 인도는 물론 동남아시아 국가들한테서도 외면받고 있다. 전통적으로 강대국 사이에서 중립 외교를 추구해 온 동남아 국가들은 우크라이나 전쟁에 관해 대체로 말을 아꼈지만 전쟁이 장기화하면서 기류가 바뀌었다. 대(對)러시아 제재를 강하게 밀어붙이는 서방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아시아에서 외교적 활로를 찾으려 했던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전략이 흔들리고 있다.

서방의 대러 제재 우려… 동남아, 러 군사 의존 탈피

19일(현지시간) 독일 공영방송 도이체벨레(DW)는 “러시아는 급성장하는 아시아·태평양에서 에너지, 자원, 국방력, 원자력 기술의 원천으로 자리매김하려는 지정학적 열망을 갖고 있다”며 “그러나 전략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제공할 것이 많지 않기 때문에 결코 성공할 수 없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러시아는 올해 2월 말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후 국제사회 ‘왕따’로 전락하자 동남아로 눈을 돌려 적극 구애했다. 7월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이 베트남과 인도네시아를 방문하고, 극심한 에너지난을 겪는 라오스 등에 원유도 싸게 공급했다. 푸틴 대통령은 이달 초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린 동방경제포럼에서 “아시아는 러시아 국민에게 새로운 기회”라고 치켜세웠다.

그러나 가장 믿었던 나라들이 가장 먼저 등을 돌렸다. 최근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에서 열린 상하이협력기구 정상회의에 참석한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는 푸틴 대통령 면전에서 “지금은 전쟁의 시대가 아니다”라고 질타했고,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도 이례적으로 “의문과 우려”를 표했다. 러시아와 ‘손절’하는 것이라 속단할 수는 없지만, 태도가 싸늘해진 것만은 사실이다.

동남아도 냉담해지고 있다. 지난달 필리핀은 러시아제 군용 헬기 16대 구매 계약을 파기했다. 베트남도 연례행사인 러시아와의 합동 군사훈련을 올해 말 실시한다는 언론 보도에 대해 명확한 언급을 피하고 있다. 베트남은 1995~2021년 사들인 군사 장비 80%가 러시아산일 정도로 러시아 군사력에 의존해 왔지만, 최근에는 무기 구매도 크게 줄였다.

싱크탱크 스톡홀름국제평화연구소(SIPRI) 조사에 따르면, 2017~2021년 베트남의 러시아제 무기 수입은 2012~2016년과 비교해 무려 71% 급감했다. 같은 기간 인도도 러시아제 무기 구매를 47% 줄였다. DW는 “베트남은 (러시아·이란·북한을 겨냥해 제정된) ‘미국 적대세력 통합 제재법(CAATSA)’에 따라 미국의 제재를 받게 될까 봐 두려워하고 있다”고 짚었다.

경제적 이득도 미미… 균형 외교도 시험대

경제적 실리를 따져 봐도 동남아가 제재 위반을 감수하면서까지 러시아를 챙길 이유는 없다. 2018년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아세안)은 러시아와의 관계를 ‘포괄적 동반자’에서 ‘전략적 동반자’로 격상했으나, 지난해 양자 무역 규모는 200억 달러(약 27조8,500억 원)로 2012년 182억 달러와 비교해 미미하게 증가했을 뿐이다. 반면 중국과 무역 규모는 8,780억 달러(약 1,222조6,150억 원), 미국과는 4,417억 달러(약 615조672억 원)를 기록했다. 심지어 대만과의 거래도 러시아보다 4배나 많았다. 동남아 입장에선 미국이 러시아보다 훨씬 중요해진 것이다.

동남아에서 확실한 러시아 편은 미얀마 군사정권뿐이다. 러시아는 지난해 2월 쿠데타를 일으킨 미얀마 군부에 무기와 값싼 에너지를 제공하며 우군으로 끌어들였다. 헌터 마스턴 호주국립대 연구원은 “양국은 상호 필요성과 권위주의 정치 체제를 공유하며 동맹을 맺었지만, 민 아웅 흘라잉 미얀마 최고사령관이나 푸틴 대통령 중에 한 명이라도 권력을 잃으면 우호 관계가 깨질 것”이라고 평가절하했다.

러시아는 에너지를 앞세워 동남아를 파고들고 있다. 7월 베트남은 러시아 에너지 기업과 풍력단지 건설 계약을 체결했고, 인도네시아는 러시아의 원자력발전소 투자 제안과 러시아산 에너지 수입 확대를 검토 중이다. 다만 전문가들은 장기적 관계로 이어지진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프레더릭 클림 싱가포르 난양공대 라자라트남국제연구소(RSIS) 연구원은 “미얀마 군사정권을 제외하고는 아세안 회원국 중 누구도 러시아와의 경제적 미래를 바라보지 않는다”고 평했다.

한층 확고해진 서방과 러시아의 대치 전선도 동남아에 선택을 압박하고 있다. 외교전문지 디플로매트는 “전쟁이 길어지면서 서방은 비자 제한과 러시아 원유 가격 상한제 등 더욱 강력한 대러 제재를 추진하고 있다”며 “동남아는 양 진영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할 여지가 줄어들면서 점점 더 많은 압력에 직면할 것”이라고 진단했다.

김표향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