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하게 컸어?" 화장실에서 직장 선배가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이렇게 묻자 인경(남지현)은 깜짝 놀라 "예?"라고 되물었다. "하도 잘 참아서." 선배는 후배의 마음에 끝내 비수를 꽂는다. tvN 드라마 '작은 아씨들'은 곳곳에 잠복해 있던 가난을 향한 시선의 폭력을 집요하게 끄집어낸다.
영화 '기생충'(2019)이 가난을 기택(송강호)의 반지하 집에 숨겨놨다면, '작은 아씨들'은 세 자매가 사는 옥탑방에 올려놨다. 가장 높은 곳 즉 꼭대기에서 부모 도움 없이 자란 세 자매의 삶은 날개 없이 추락한다. "(가난한) 언니들한테는 배울 게 없잖아." 고등학생인 막내 인혜(박지후)는 결국 옥탑방을 떠나기로 마음먹는다. 가난이 만든 네트워크의 빈곤이 얼마나 무서운지 일찌감치 깨달은 것이다.
가난을 재벌 왕자님과 신데렐라의 로맨스를 위한 땔감으로 쓰는 K콘텐츠가 여전히 쏟아지고 있지만, 정서경 작가는 다른 길을 걷는다. 19세기에 나온 소설 '작은 아씨들'을 모티브로 원작의 주인공들을 21세기 한국으로 데려와 "가난은 겨울옷으로 티가 나요"라며 돈과 가난의 현실을 얘기하고 계급이 어떻게 사회에 침투했는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그래서 이 드라마는 가난을 고백하고 이야기하게 만든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엔 '한 번도 어른이 되고 싶은 적이 없었다는 인혜의 말처럼 가난은 아이를 어른이 되는 것조차 두렵게 만든다' 같은 드라마 후기가 줄줄이 올라왔다.
영화 '헤어질 결심'으로 '폐인'을 양산한 정 작가가 '작은 아씨들'로 시청자를 안방극장으로까지 불러 모으고 있다. 18일 기준 '작은 아씨들'은 넷플릭스 비영어권 인기 드라마 최신 주간 차트에서 '수리남'(5위)에 이어 7위를 달리며 화제다. 그는 출판시장에서도 베스트셀러 작가로 떠올랐다. 지난달 책으로 나온 '헤어질 결심' 각본집은 출간 1주일 만에 11쇄를 찍고 주요 온라인 서점(예스24 8월 종합 베스트셀러 1위)에서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 '친절한 금자씨'(2005), '박쥐'(2009), '아가씨'(2016) 등에서 박찬욱 감독과의 공동 작업으로 늘 거장의 뒤에 가려졌던 정 작가의 전성시대다.
정 작가는 ①이야기에 고전적 낭만과 현대적 새로움을 섞어 ②적대적 이분법으로 캐릭터를 단편적으로 그리지 않으며 ③계급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해 MZ세대를 자신의 글로 불러 모으고 있다는 분석이다. '수상한 식모들'을 쓴 박생강 작가는 "고전적 서사를 현대인의 초상에 맞게 변주하고 현실에 맞게 비틀 줄 아는 게 정 작가의 특기"라며 "가볍기만 한 이야기에 싫증난 이들이 무게 있으면서도 낡지 않은 그의 이야기에 흥미를 보이는 것"이라고 의견을 냈다. '헤어질 결심'에서 쓰인 '마침내' '붕괴(崩壞)됐다' 등의 문어체는 온라인에서 해시태그를 단 채 곳곳에서 소환되고 있다. 관객들이 문어체 특유의 뉘앙스를 즐기고 있는 것이다. '심심(甚深)한 사과' 곡해 논란의 정반대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례적 유행이다.
상대를 쉽게 가르치려들지 않는 것은 정 작가의 장점이다. 윤석진 충남대 국문과 교수는 "'친절한 금자씨'에서 출소한 금자(이영애)가 목사에게 '너나 잘하세요'라고 말하듯 정 작가는 '작은 아씨들'에서도 다양한 인물의 속물 근성을 끄집어 내 '누가 누구를 손가락질할 수 있나'를 물으면서 그 손가락질이 결국 나를 향하게 만든다"고 말했다. '작은 아씨들'에서 인경은 '어떤 가난은 사람을 강하게 만든다'고 언니를 비판하지만 결국 그 가난의 두려움에 쪼그라들어 술을 마시지 않고는 일하지 못한다. 정 작가는 '헤어질 결심'에서 학대당하는 중국인 서래를 현지 독립군 외조부의 손녀로 설정해 꼿꼿함을 부각한다. 문화다양성을 짓밟는 세태 풍자를 위한 입체적 캐릭터 구축이다. "글을 쓸 때 주인공의 입장에서 먼저 쓰고 다음엔 상대방의 입장에서 다시 써요. 그다음 제3의 인물 시선으로 대본을 다듬죠. (그래야)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여러 사람의 관점으로 재구성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니까요." 정 작가의 말(JTBC '차이나는 K-클라스'·2021)이다. 성상민 문화평론가는 "이런 작업 방식으로 인해 정 작가의 작품을 보면 등장 인물이 '왜 이때 그렇게 행동했을까'란 동기에 집중하게 된다"고 말했다.
서울대 철학과를 중퇴한 정 작가는 한예종 영상원에서 시나리오를 전공했다. 3학년 때 미국으로 어학연수를 떠난 그는 외국인으로 살며 '아무것도 아닌 존재'의 절망을 맛봤다. 영상원 졸업 후 백수로 9개월, 그는 "먹고살 수 있는 직업"으로 시나리오 작가를 택했다.
그런 그는 작품에 계급 문제를 날카롭게 벼린다. '작은 아씨들'에서 셋째는 결국 가난으로 갓난아기 때 죽는다. 그걸 본 맏이 인주는 "가난하면 죽는다"를 이를 악물고 품고 산다. 김헌식 문화평론가는 "'작은 아씨들'은 사회적 약자로 착취당하고 시달리는 시청자들에게 '우리는 어떻게 저항하며 살아가야 하는가'를 고민하게 한다"고 말했다. "폭력이 없는 이야기는 쓰고 싶지 않아요. 행복만 가득한 이야기는 우리를 변화시키지 않으니까요."(정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