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회사 동료가 어느날 제 이름을 대며 'O투더 O투더 O!'라며 인사하는 거에요. '우영우식' 인사법이 재미있다면서요."
미국 뉴욕에서 디자인 관련 회사에 다니는 이모씨는 최근 한국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이하 우영우)'의 인기를 실감했다며 이같이 말했다. 이씨에게 인사를 건넨 동료는 미국인으로,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넷플릭스에서 '우영우'를 접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이씨에게 재미있는 한국드라마를 추천해달라고 했다고.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가진 변호사 우영우 이야기는 미국 사회에도 강한 울림을 주며 호평을 받고 있다. 특히 지난달 31일부터 이달 2일까지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 열린 '국제방송영상마켓(BCWW) 2022'에서 미국과 일본, 중국, 독일, 필리핀 등 세계 곳곳에서 리메이크 제안을 받는 등 '우영우 열풍'이 이어지고 있다.
이처럼 K-콘텐츠는 전 세계에 영향을 미치며 신드롬의 중심에 서 있다. 지난 12일(현지시간) 미국 에미상 시상식에서 넷플릭스의 '오징어 게임'은 드라마 부문 감독상(황동혁)과 남우주연상(이정재)을 거머쥐며 새 역사를 썼다. 비영어권 작품 최초로 올린 엄청난 성과다. '오징어 게임'의 이정재는 뒤늦게 글로벌 스타 반열에 오르면서 미국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영화 '스타워즈'의 드라마 버전에 주인공으로 낙점됐다. K-콘텐츠가 전 세계에서 문화 아이콘이 된 것이다.
글로벌에 K-콘텐츠를 소개한 파트너 넷플릭스의 노고도 빼놓을 수 없다. 2017년 봉준호 감독의 '옥자'로부터 시작된 넷플릭스와의 인연은 이제 공생관계가 된 듯하다. K-콘텐츠가 걸어온 성공의 역사를 살펴봤다.
"개인적으로 극장에서 상영하지 않는 작품이 황금종려상을 수상하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2017년 5월 18일, 프랑스 칸영화제의 메인 행사장인 팔레 데 페스티벌 기자회견장. 심사위원장인 영화감독 페드로 알모도바르는 영화제 개막 전날 열린 기자회견에서 이같이 말했다. 경쟁 부문에 진출한 영화 '옥자'와 '더 마이어로위츠 스토리스'에 엄격한 잣대를 들이댔다. 좀 더 풀어 얘기하면, 수상자 명단에서 제외시키겠다는 선포였다.
영화제 개막 전부터 논란이 불거진 것이다. 그 이유의 핵심은 넷플릭스였다. 봉준호 감독의 '옥자', 노아 바움백 감독의 '더 마이어로위츠 스토리스'는 넷플릭스가 투자한 영화였고, 칸영화제 이후 6월에 넷플릭스를 통해 전 세계에 공개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프랑스극장협회는 이들 영화에 태클을 걸었다. 당시 프랑스 법률에 따르면 '극장 상영 3년 이후에 스트리밍서비스가 가능'했다. 그런데 넷플릭스 영화가 경쟁 부문에 진출한 것은 프랑스 법률을 위반했다는 주장을 들며 반발했다. 극장과 OTT 간 힘겨루기의 서막이었다.
결국 사달이 났다. 기자회견 다음날인 19일 오전 8시 30분, 칸 뤼미에르 극장에서 열린 '옥자'의 전 세계 첫 시사회에 불똥이 튀었다. 영화가 시작되고 얼마지나지 않아 관람석에서 야유와 박수가 동시에 터져 나왔다. 영화 시작 8분 만에 갑자기 상영이 중단됐다. 현장에 있던 한국 기자들은 넷플릭스 로고 때문에 터진 일이라고 보도한 곳이 많았다. 스크린에 문제가 있어서 관객들이 다시 상영하라는 의미의 소란이었다는 주최 측의 설명이 있었다. 그렇게 영화가 중단된 지 10분여 만에 처음부터 다시 상영됐다.
이유가 어찌 됐건 '옥자'가 구설에 오르는 상황이 연출됐다.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봉 감독이 넷플릭스로 인해 자칫 명예가 실추되는 것 아닌지 우려스러웠다. 극장과 OTT 간 싸움의 희생양으로 전락하는 것처럼 보일지도 몰라서다.
그렇게 '옥자'는 그해 칸영화제 내내 '뜨거운 감자'로 중심에 섰다. 결국 칸영화제 측은 프랑스극장사들의 압박에 항복했다. 칸영화제 측은 "내년부터 인터넷 배급 영화를 경쟁 부문에 초청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극장 상영을 기반으로 한 영화만 초청하겠다는 새로운 규정을 만들었다. 사실 영화제 초반 '옥자'는 화려한 출연진으로 영화제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틸다 스윈튼, 릴리 콜린스, 제이크 질렌할, 스티븐 연 등 쟁쟁한 스타급 배우들은 칸영화제 레드 카펫을 밟으며 엄청난 카메라 세례를 받았다. 하지만 개막과 동시에 찬밥 신세가 된 듯했다. 봉 감독도 시상식이 열리기 전에 칸을 떠났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봉 감독은 국내에 돌아와서도 편치 못했다. 당시 CGV·롯데시네마·메가박스 등 국내 3대 멀티플렉스 극장 체인들은 '옥자' 상영을 사실상 보이콧했다. 넷플릭스를 통해 동시 개봉하는 것에 거부 입장을 밝혔다. 통상 3주 간의 '홀드 백(한 편의 영화가 극장에서 상영된 후 TV 등으로 풀리기까지 필요한 기간)' 기간을 갖는 국내 극장계 관례상 어긋난다는 것이다. "영화사업의 생태계를 해친다"는 이유였다.
봉 감독은 그래도 의연하게 대처했다. 국내 멀티플렉스와 넷플릭스의 입장을 이해한다며 "왜 이런 논란이 나왔느냐면, 나의 영화적인 욕심 때문이다. 보통 넷플릭스 영화가 극장 개봉을 강행한 적이 없다. 그 원인 제공은 나"라고 자신을 탓했다. 촬영감독과 함께 영화를 찍는 내내 큰 극장에 걸 수 있으면 좋겠다는 뜻을 내비쳤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한국에서 '옥자'가 앞으로의 규정이나 룰을 정비하는 데 좋은 영화라고 생각한다"며 "이 논란에 휘말려 여러 피로함을 겪으셨을 업계 분들에게 죄송하다"는 사과까지 했다.
돌이켜보면 봉 감독의 잘못은 없다. 다만 빠르게 변화하는 영화산업의 생태계를 감지했을 뿐이다. 결국 칸영화제는 '옥자' 이후 OTT 투자 영화를 경쟁 부문에 초청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미국 아카데미상을 비롯해 에미상 등 각종 시상식에 OTT 작품들이 없다고 상상해보자. 과연 그 시상식이 정상적으로 진행될 수 있을까. 이후 봉 감독은 넷플릭스와 재회했다. 자신의 영화 '설국열차' 드라마 버전에 제작자로 참여해 영역을 넓히며 K-콘텐츠를 전파했다.
"와! 엄청나다" "완전히 몰입했다!"
2018년 11월 8일 밤, 싱가포르 캐피털 극장에선 환호와 박수가 터져 나왔다. 넷플릭스가 야심차게 준비한 오리지널 시리즈 '킹덤'의 1, 2회 시사회가 끝난 뒤였다. '킹덤'은 이날 아시아국가 기자들 앞에서 전 세계 최초로 시사회을 진행했다. 조선을 배경으로 한 좀비들의 등장에 외국 기자들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생경한 풍경이 호기심을 자극한 듯 보였다. 이들은 시사회 중간중간 "오"하는 탄성도 질렀다. 한 태국 기자는 "조선왕국이 너무 신비롭다"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기도 했다.
이같은 반응에 '킹덤'이 아시아 시장만큼은 통할 수 있겠다는 예상이 나왔다. 이날 한국뿐만 아니라 일본, 인도, 태국, 말레이시아 등 아시아 11개국에서 온 취재진들이 함께 했다. 넷플릭스는 당시 싱가포르에서 2019년 새롭게 공개할 12편의 콘텐츠를 아시아 시장에 소개하는 '넷플릭스 씨 왓츠 넥스트: 아시아(Netflix See What's Next: Asia)'라는 대규모 행사를 진행했다. 아시아 11개국 언론과 기업, 비즈니스 파트너 등 참여 인원만 300여 명이었다. 어쨌든 넷플릭스는 멕시코를 배경으로 한 시리즈 '나르코스' 등 새로운 콘텐츠 12편 중 '킹덤'의 시사회만 열었다. '킹덤'에 대한 넷플릭스의 남다른 기대가 드러난 장면이었다.
예상은 적중했다. 2019년 1월 25일 넷플릭스를 통해 190개국에 동시 공개된 '킹덤' 시즌1은 '조선판 좀비물' 'K-좀비' 라는 별칭을 얻으며 세계 곳곳에서 인기를 끌었다. '갓 열풍'이 분 것도 이 시기다. 극중 왕세자인 주지훈이 멋들어지게 차려입은 갓과 두루마기는 해외 시청자들에게 호기심을 자극했다. 세계 최대 규모의 온라인 쇼핑몰 아마존에선 갓이 판매 상품으로 등장했다. '넷플릭스 킹덤 속 모자', '한국 드라마 킹덤 모자' '조선왕국 전통 모자' 등으로 최대 100달러 이상 판매되는 것도 있었다. 연관 상품으로 두루마기 등 우리의 전통 의상이 추천됐다.
이런 열풍은 그 이듬해 3월 13일 공개된 '킹덤' 시즌2로 이어졌다. 한 외국인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나는 그 모자(갓) 때문에 '킹덤'을 본다"고 말한 것이 회자됐고, 또 다른 외국인은 "'킹덤' 시즌2가 시작됐다. 이번에는 더 멋진 모자들을 볼 시간이다"고 기대감을 드러냈다. 생각지도 못한 '갓 열풍'에 '킹덤' 배우와 제작진은 전통 의상에 더욱 신경 썼다. 그렇게 K-콘텐츠에 대한 관심은 한국 전통문화로까지 확대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상황까지 맞물리면서 '킹덤'의 인기는 식을 줄 몰랐다. 그해 8월 인도에서는 '킹덤' 시즌2가 톱10에 진입했다고 현지 언론 라이브민크가 보도했다. 해당 매체는 일명 '발리우드'로 대표될 만큼 자국의 강한 문화 인프라를 갖춘 인도에서 K-콘텐츠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배경에는 "넷플릭스 같은 글로벌 OTT가 긍정적 효과를 만들어내고 있다"고 분석했다.
'조선 좀비'라는 이색적인 그림은 K-콘텐츠만의 독창성을 부각했다. 도포 자락을 휘날리며 말을 타고 좀비와 싸우는 모습은 한국적 그 이상이었다. 천편일률적인 좀비물에 지친 전 세계 시청자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기에 당연했다. K-콘텐츠의 창의적인 스토리텔링이 '킹덤'을 통해 전 세계를 사로잡은 출발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뒤에 이어진 '스위트홈(2020)' 시즌1도 글로벌 열풍을 선도한 이유다. 팬데믹(전염병의 세계적 대유행) 기간 동안 세세 곳곳에선 넷플릭스 수요가 늘었고, '킹덤' 같은 K-콘텐츠에 대한 기대감이 상승했다. 그 기대는 2020년 12월 18일 '스위트홈'이 공개되자마자 드러났다.
'은둔형 외톨이' 고등학생이라는 독특한 캐릭터의 등장은 또다시 해외 시청자들을 눈길을 사로잡았다. 주민들이 괴물로 변하는 기괴한 스토리도 특색있었다. 글로벌 OTT 순위 분석사이트 플릭스패트롤에 따르면 '스위트홈'은 공개된 지 나흘 만에 한국과 홍콩,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태국, 대만 등 10개 국가의 넷플릭스 TV시리즈 순위에서 1위에 올랐다. 미국과 캐나다에선 7위, 독일과 프랑스, 핀란드 등 유럽 국가를 포함한 전 세계 39개국에선 10위권 안에 들어 엄청난 파급력을 보여줬다.
"미국 아카데미시상식의 역사를 바꾼 영화 '기생충'처럼 '오징어 게임'도 미국의 에미상에 새 역사를 썼다."
미 CNN방송은 극찬에 극찬을 더했다. 지난 13일 미국 로스앤젤레스(LA)에서 열린 제73회 에미상 시상식은 또다시 '오징어 게임' 잔치를 보는 듯했다. 지난해 9월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된 '오징어 게임'이 1년이 흐른 시점에도 여전한 명성과 인기를 구가했다. 황동혁 감독은 TV부문 감독상, 배우 이정재는 TV부문 남우주연상을 각각 수상하며 K-콘텐츠의 위엄을 드높였다.
특히 비영어권 작품 최초의 에미상 수상은 미국의 자존심마저 꺾은 일대의 사건이었다. 국내 한 드라마제작사 관계자는 "'기생충'이 아카데미시상식에서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등 주요 상을 휩쓴 것은 미국의 콧대 높은 문화적 우월감에서 비롯된 모든 잣대가 무너지는 순간이었다"며 "'오징어 게임'도 전 세계적인 신드롬 앞에 미국의 고집과 자존심을 세울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즉 "미국의 시상식이 한국이라는 작은 나라에서 만들어낸 콘텐츠의 위력을 새삼 실감하는 자리를 만들어준 것"이라는 얘기다.
사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 신드롬은 해외시장에서 K-콘텐츠에 대한 신뢰를 한층 두텁게 만들었다. 2019년 5월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이후 그 이듬해 미 아카데미시상식에서의 성과는 입이 아플 지경이다. 그 긍정 효과는 영화 '미나리(2021)'를 통해 연장됐다. 미국의 각종 영화시상식을 석권하며 심상치 않은 기운을 보인 정이삭 감독과 배우 윤여정의 행보는 결국 아카데미시상식에 노미네이트 되는 순간을 맞닥뜨렸다. '미나리'는 작품상 후보가 됐고 정 감독은 감독상과 각본상 후보에 올랐다. 윤여정과 스티브 연은 각각 여우조연상-남우주연상에 나란히 이름을 올렸다. 결과는 다 아는 바와 같이 윤여정의 여우조연상 수상. '기생충'에서 놓친 배우상의 획득으로 K-콘텐츠가 갈 수 있는 최정점을 찍은 것 같았다.
하지만 지난해 9월 '오징어 게임'의 등장은 또 다른 출발을 제시했다. 공개 이후 한 달 뒤에 넷플릭스는 "'오징어 게임'은 28일 간 유료가입자 1억4,200만 가구가 시청했다"고 놀라워했다. 또한 플릭스패트롤에 따르면 '오징어 게임'은 공개된 지 2주여 만에 넷플릭스가 정식으로 서비스 되는 모든 나라(83개국)에서 TV부문 1위를 차지하는 대기록을 세웠다. 전무후무한 기록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아울러 현대 사회가 직면한 문제를 짚어내며 전 세계인들의 공감을 얻는 데 성공했다. 호평이 잇따른 이유다.
방탄소년단(BTS)과 '기생충'으로 K팝과 K무비의 높아진 위상은 '오징어게임'으로 K드라마까지 가세해 한국 대중문화의 격을 넘볼 수 없게 만들었다. 특히 드라마라는 높은 장벽을 허물었다는 점에 주목할 만하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최근 CBS라디오를 통해 "사실 K팝, K무비보다 K드라마가 진입장벽이 훨씬 높다"며 "드라마는 아무래도 다 집에서 TV로 보기 때문에 결국 자국의 언어 등이 훨씬 더 익숙하다. 그런데 그걸 넘기가 어려운데도 전 세계에서 '오징어 게임'을 다 봤다는 것 아닌가"라고 말했다.
'오징어 게임'의 성공은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로 공개된 '지금 우리 학교는' '지옥' '수리남' 등의 높은 성적으로 이어졌다. 공개되자마자 많은 나라에서 TV시리즈 부문 톱10 안에 들거나, 높은 시청 시간을 기록해 '믿고 보는 K-콘텐츠'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그러면서 한국과 한국인, 한국 문화로 그 호기심이 확대되는 추세다. '오징어 게임'의 주연배우 이정재가 영화 '스타워즈'의 드라마 버전 주인공으로 발탁됐다는 사실만 봐도 그렇다. 미국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스타워즈'의 주인공을 아시아인, 그것도 한국배우를 내세운다는 건 엄청난 변화다. 미국 영화나 드라마 산업 전반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 언론도 "메가 히트"라는 표현으로 K-콘텐츠의 대단함을 전했다. 미 블룸버그통신은 "2020년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의 성공과 2021년 '미나리'의 윤여정이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데 이은 메가히트"라고 평했다. 일본 TV아사히는 에미상 결과를 보도하며 "미디어 생태계의 변화에 따라 미국 작품이 아니어도 세계 엔터테인먼트의 정점에 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