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프랑스 영화계 누벨바그(Nouvelle Vague·'새로운 물결') 사조의 기수였던 장뤼크 고다르 감독의 사인이 '조력존엄사(assisted suicide)'로 알려지면서 국내외 존엄사 관련 논의가 주목받고 있다. 프랑스는 내년까지 이와 관련한 국가차원의 토론을 갖기로 했고, 우리나라는 조력존엄사 관련법이 지난 6월 국회에 발의돼 심의 중에 있다.
13일(현지시간) AFP통신 등 외신은 고인이 이날 스스로의 뜻에 따라 의료진 도움을 받은 조력존엄사 방식으로 숨을 거뒀다고 보도했다. 고다르의 법률고문인 패트릭 잔느레에 따르면, 고인은 생전 다수의 불치성 질환을 앓고 있었고, 존엄하게 죽기를 희망했다. 앞서 고다르의 가족은 고인이 자택에서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편안히 눈을 감았다고 밝혔는데, 잔느레의 말을 감안하면 약물 투여 후 숨을 거둔 것으로 풀이된다.
조력존엄사는 현재 우리나라에서 허용되는 '연명치료 중단'과는 다르다. 연명치료 중단은 말기 환자의 생명을 인위적으로 연장하는 인공호흡기 착용, 심폐소생술 등을 중단해 죽음을 맞도록 하는 '소극적 존엄사'다. 반면 조력존엄사는 의료진이 말기 환자에게 약물을 처방하되, 환자 스스로 그 약물을 복용 또는 투약해 죽음에 이르는 보다 적극적인 존엄사를 가리킨다. 의사가 직접 환자에게 약물을 투여해 죽음에 이르게 하는 안락사와도 차이가 있다. 현재 전 세계에서 조력존엄사를 법으로 허용하는 곳은 미국 12개 주와 스위스,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 콜롬비아, 캐나다 퀘벡주, 호주 빅토리아주 등으로 알려졌다.
고다르의 고향 프랑스에서도 조력존엄사는 불법인데, 그가 조력존엄사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던 이유는 1972년 영화 '만사형통' 개봉 후 여생을 스위스에서 보냈기 때문이다. 그는 말년에 스위스 로잔 인근의 소도시 롤레에서 지냈다.
고다르의 죽음 이후, 프랑스에서도 조력존엄사 합법화 관련 논의가 본격화할 전망이다.
프랑스 엘리제궁은 고다르 별세 당일 홈페이지에 성명을 내고 이른바 '죽음을 선택할 권리'에 대한 국가 차원의 토론에 돌입하겠다고 밝혔다. 엘리제궁은 일반 시민들로 구성된 위원회가 보건 분야 종사자들의 협조하에 수개월간 해당 사안을 다룰 예정이며, 지역별 토론도 실시한다고 소개했다. 동시에 정부 차원에서 각 정당 소속 의원들과 논의를 진행, 내년쯤 관련 법 개정 등을 본격화한다는 방침이다.
우리나라는 지난 6월 안규백 더불어민주당 의원 등이 '호스피스·완화의료 및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결정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을 발의한 상태다. 개정안은 보건복지부 산하 조력존엄사심사위원회를 신설하고, 조력존엄사를 희망하는 사람이 위원회에 조력존엄사를 신청해 심사를 받도록 한다. 대상자는 △말기 환자에 해당해야 하고 △수용하기 어려운 고통이 발생하고 있으며 △자신의 의사에 따라 조력존엄사를 희망하고 있다는 세 가지 요건을 증명해야 한다. 조력존엄사를 도운 담당 의사에 대해선 형법상 자살방조죄 적용이 배제된다.
살 가망이 없는 말기 환자에게도 선택권을 제공하자는 게 법안의 취지이지만, 생명경시 풍조를 부추기고 사회적 타살을 조장할 수 있다는 비판도 거세다. 사회적 파장과 국내 연명치료 중단의 합법화 과정을 볼 때 실제 입법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
연명치료 중단은 2009년 일명 '김 할머니 사건'을 계기로 사회적 관심이 촉발된 후 수차례 관련법이 발의됐지만, 2016년에야 국회를 통과해 2018년부터 시행 중이다. 2009년 당시 76세의 나이로 식물인간 상태가 된 김 할머니의 가족들이 인공호흡기를 떼어 달라며 소송을 제기하며 사회적 쟁점으로 떠올랐다.
조력존엄사에 대해 여론은 일단 호의적이다.
개정안 발의 후 한국리서치가 국내 성인 1,000명에게 조력존엄사에 대한 의견을 물은 결과 응답자 10명 중 8명이 조력존엄사 합법화에 찬성한다고 답했다. 지난 7월 1~4일 진행된 이 여론조사에서 조력존엄사 법제화를 '매우 찬성한다'는 의견이 20%, '찬성한다'는 의견이 61%였다(신뢰수준 95%, 표본오차 ±3.1%포인트). 휴대전화 문자와 이메일을 통해 진행된 이 조사에서 반대는 19%(반대16%‧매우 반대3%)에 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