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형(57·사법연수원 18기) 전 대법관은 민법 최고 권위자로 꼽힌다. 대법관 재임 시절엔 '양심적 병역거부'와 '합의에 따른 동성 군인 성관계' 처벌 불가 판결을 내리는 등 사회 변화를 이끄는 판례를 남겼다.
김 전 대법관은 1986년 제28회 사법시험에 합격해 1992년부터 판사 생활을 시작했지만, 양창수 전 대법관의 제의로 3년 만에 법복을 벗고 서울대 법대 교수로 자리를 옮겼다.
김 전 대법관은 서울대에서 20년 넘게 민법 강의를 도맡으며 후학 양성과 연구에 매진했다. 교수 시절 민법론과 민법총칙 등 다양한 민사법 전공서적과 논문을 저술하고, 민사재판 실무상 난제 해결을 위한 이론적 토대를 마련해 '민법 대가'라는 명성을 얻었다.
그는 2016년 이인복 전 대법관 후임으로 서초동 생활을 시작했다. 양 전 대법관에 이어 학자 출신으론 두 번째 대법관이었다. 대법원은 김 전 대법관에 대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민법 권위자이면서 학자로서는 흔치 않게 실무경력도 갖춘 법조인"이라며 "한국 법학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고 밝혔다.
김 전 대법관은 재임 기간 굵직한 판결을 여럿 남겼다. 전원합의체 주심으로 2015년 대법원 판례를 깨고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 '긴급조치 9호'로 수사와 재판을 받은 피해자들에 대한 국가의 배상 책임을 인정했다. 또 종교적 신념을 이유로 군입대를 하지 않는 '양심적 병역거부'와 부대 밖 사적 공간에서 합의에 따라 이뤄진 동성 군인 성관계에 무죄 판결을 내렸다.
민법 권위자로서의 판결도 돋보였다. 토지 공유자 가운데 일부가 다른 공유자와 상의 없이 공유 토지를 무단으로 사용하더라도 토지 인도 청구는 할 수 없다는 판결이 대표적이다. 김 전 대법관은 삼성전자 LCD공장 노동자의 다발성 경화증을 산업재해로 인정하기도 했다.
김 전 대법관은 퇴임식에서 정치권에 쓴소리를 남겼다. 그는 "입법이 제때 이뤄지지 않아 국민들이 권리 구제를 받지 못하고, 불필요한 소송으로 이어져 사회적 낭비를 초래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대법관을 보수 혹은 진보로 분류해 어느 한쪽에 가둬 두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도 했다.
김 전 대법관은 상고제도 개혁도 강조했다. 그는 "대법원이 신속하고 공정하게 사건을 처리하면서도 전원합의체와 공개 변론을 활성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려면 상고심 제도의 개선이 선행돼야 한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