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적인 추석 귀성 행렬이 시작되던 8일 오후 해미씨는 서울의 한 지하철 역사에 위치한 자신의 '작은 고향'에서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알파카 털로 만든 알파카 인형부터 실팔찌, 가죽 지갑까지 남미풍 액세서리로 가득한 페루 전통 소품 숍, 페루 출신 귀화인인 이타보아다 해미(58)씨는 이 곳을 작은 고향이라 부른다. 잔잔하게 흐르는 남미 가요를 배경음악 삼아 소품을 구경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남미에 온 듯한 착각에 빠진다.
페루로 통하는 '마법의 문'은 매일 오후 4시부터 밤 10시까지 지하철 역사 승강장에서 열린다. 기껏해야 3평 남짓한 가판대지만 해미씨의 손길이 닿으면 20분 만에 그럴듯한 점포가 된다. 제법 널찍한 진열대용 테이블 3개와 의자, 각종 수납용 가방들이 이 좁은 공간에서 나온다는 게 보고도 믿기지 않는다. 26년 전인 1996년 처음 한국에 온 이래 박람회 부스부터 시작해서 역삼, 사당 등지에서 수많은 점포를 운영해 온 해미씨는 그야말로 ‘판매 베테랑’이다. 지하철 승강장에 위치한 가판대를 임대한 것 역시 오랜 경험을 통한 자신감 덕분에 가능했다.
"다양한 사람들과 부담 없이 만날 수 있어서 좋아요." 불특정 다수가 끊임없이 지나다니는 지하철이라는 공간이 두렵지 않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해미씨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해미씨는 술에 취해 비틀 거리는 아저씨에겐 잠시 앉아 있다 가라 하고, 울고 있는 이들에겐 다가가 달래주기도 한다고 했다. 한 번은 "이거, 이거, 이거 다 주세요"라며 20만 원치나 구입해 간 간호사 아가씨도 있었다. 다음 날 다시 찾아왔길래 '환불하진 않을까' 했는데 오히려 물건이 예쁘다며 더 사 갔다는 후일담에선 제품에 대한 자부심도 묻어난다.
머나먼 타국에서 사업 수완을 발휘하며 아이 둘을 키워낸 해미씨지만 고향 페루만큼은 한시도 잊지 못한다. 그런 해미씨에게 지하철역 점포는 작은 페루다. 매일 오후 4시 장사 준비가 끝나면 해미씨는 휴대폰으로 페루 가요를 듣고 뉴스 유튜브 영상을 본다. 한국에 온 지 벌써 26년째이지만 아직 해미씨에게는 한국어보단 스페인어가 편하고, 명절엔 한국음식보단 스페인 음식을 해먹는다. 한국말을 못 알아듣는다고 해서 나무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오히려 해미씨 만의 고유한 개성과 말투 덕분에 점포는 더욱 특별해진다.
낯선 나라에 정착하느라 힘들었던 만큼 페루를 그리워했으나 고향 땅을 밟을 기회는 그리 쉽게 오지 않았다. 투병 중인 남편 대신 딸과 아들을 홀로 키워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몇 해 전 해미씨의 딸은 엄마 몰래 돈을 모아 페루행 비행기 티켓을 깜짝 선물했다. 가족들에게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좀처럼 내보이지 않았던 해미씨지만 페루 땅을 밟자 감격이 눈물이 흘렀다.
오는 10월 해미씨는 한국에 온지 세 번째로 고향 페루를 찾는다. 가족과의 재회와 함께 '제2의 해미'를 찾는 기대도 가지고 있다. 해미씨는 과거 자신처럼 재능이 있지만 기회가 없던 페루 대학생들을 한국으로 데려와 교육하고 싶다고 했다. 한국을 비우는 동안 점포는 아들이 맡아 운영하기로 했다. 아들 또한 현재 2호선 잠실역 지하상가에서 페루 기념품 점포를 하고 있으니 큰 걱정은 하지 않는다.
“파티 파티.” 해미씨의 추석 연휴 계획이다. 해미씨는 명절이면 남편과 아들, 딸과 둘러앉아 맛있는 음식을 해먹는다고 했다. 특별 요리인 스페인식 바비큐가 빠지지 않는다. 김치와 된장도 "너무 맛있어"라고 극찬할 정도로 좋아하지만 제일 입에 맞고 속이 편한 음식은 페루 음식이다. 최근엔 아들이 엄마의 스페인 요리를 제법 잘 따라하고 있다.
추석 명절 이야기를 들려주던 해미씨는 문득 과거 페루에서 가족과 보냈던 크리스마스를 떠올렸다. 크리스마스트리를 세우고 식구들이 모여 앉아 돼지고기 바비큐와 와인을 즐기곤 했다. 해미씨는 "케이크와 핫초코를 먹으면서 밀린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집은 금방 시끌벅적해졌다"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올해는 추석을 두 번 쇠네요. 9월에 한국 가족들과, 12월엔 페루 가족들과 함께 보낼 거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