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삿갓면은 강원도 최첨단 지역으로 주민의 85%가 농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청정한 자연환경을 잘 보존하고 있는 국제슬로시티로서….’ 인터넷에 나와 있는 영월군 김삿갓면의 어느 마을 소개 글이다. ‘최첨단’의 근거가 불분명한데, 영월의 지명만큼은 고정관념을 깨는 최신식이다. 읍내를 기준으로 남면과 북면이 그대로이긴 하지만, 한반도면 무릉도원면 산솔면 등은 지형적 특성과 상징물을 내세워 개조한 경우다. 영월 동쪽의 김삿갓면도 마찬가지다.
단양 영춘면과 경계 지점에 지명의 유래가 된 김삿갓유적지가 있다. 문학관과 묘역, 그가 살던 집을 포괄하고 있다. ‘방랑시인’ 하면 전국을 유람하며 풍류를 즐기는 과객으로 여기기 쉽지만 김삿갓이 얼굴을 가린 연유는 풍류와 거리가 멀다.
김삿갓(김병연·1807~1863)의 조부 김익순은 홍경래의 난 때 평안도 선천 부사로 있다가 반란군에 투항했다. 역적이 된 조부는 참수당하고 가족은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으나 부친은 도피 생활 중 사망한다. 모친이 4형제를 데리고 숨어든 곳이 이곳 영월 산골짜기다. 그렇게 외부와 벽을 쌓고 살던 집안은 병연의 남다른 재주로 바깥 세상과 다시 만난다.
문장 솜씨가 뛰어난 병연은 영월에서 열린 백일장에서 20세의 나이로 급제를 하게 되는데, 공교롭게도 백일장의 내용이 조부의 역적행위를 날카롭게 비판하는 글이었다. 뒤에 어머니로부터 가족사를 알게 된 병연은 삿갓을 쓰고 평생 전국을 떠돌며 방랑생활을 이어간다. 나라에 충성하자니 불효가 되고, 조상을 섬기자니 역적이 될 처지에서 그가 선택할 길은 많지 않았다.
그래도 천재 시인의 글재주는 송곳처럼 주머니를 뚫고 나와 수많은 한시를 남겼다. 김삿갓문학관에서 풍자와 해학, 19금을 넘나드는 언어유희로 버무린 촌철살인의 문장을 음미할 수 있다.
개울 건너에 그의 묘지가 있다. 시비로 장식된 산책로를 따라가면 양지바른 산자락에 작은 봉분이 있다. 근래에 세운 ‘시선난고김병연지묘’라는 비석을 제외하면 제단도 갖추지 못한 평범한 무덤이다. 김삿갓은 1863년 57세의 나이로 전남 화순군 동복면에서 사망했는데, 아들이 3년 뒤 자기 집 가까운 이곳 노루목 기슭으로 이장했다. 권위가 예전만 못하다지만 엄연히 임금이 다스리던 나라였으니 번듯한 비석 하나 세우기 어려운 시절이었다.
그가 살던 곳은 묘지에서도 약 1.6㎞ 떨어진 깊은 골짜기다. 계곡과 나란히 이어지는 제법 가파른 길을 올라야 한다. 민가가 한 채 있어서 시멘트 포장이 된 도로지만 외부 차량은 들어갈 수 없다. 듬성듬성 이어지는 비탈밭에는 가을 볕에 오미자가 발갛게 익어가고, 낙차가 큰 계곡에선 맑은 물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시골길인 듯, 등산로인 듯 30여 분을 걸으면 찻길이 좁아지는 곳에 초가 한 채가 자리 잡고 있다. 해발 550m 부근, 도로가 난 지금도 숨이 차는 산중턱이니 당시로선 세상과 담쌓을 결심이 아니면 가기 어려운 곳이다.
김삿갓유적지 주차장은 문학관 앞인데, 묘지와 살던 곳은 개울 건너편이다. 200m가량 인도 없는 차도를 걸어야 한다. 횡단보도도 없으니 무단으로 건널 수밖에 없다. 차량 통행이 적다지만 관광지로 홍보하며 불법과 위험을 방치하는 무신경이 아쉽다.
김삿갓유적지에서 건너편으로 보이는 망경대산(1,088m) 자락에 모운동 마을이 있다. 행정 지명은 주문리지만 언젠가부터 모운동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아침나절이나 비가 갠 후에는 어김없이 구름이 모여드는 곳이라는 의미다. ‘회운(會雲)’이나 ‘구름마을’이 아닌, 한글과 한자의 기묘한 조합인데 전혀 어색하지 않다. 망경대산 정상 부위의 한 자락이 갑자기 툭 내려앉은 것처럼 분지가 형성된 고원이다. 느낌으로는 도교적 이상향으로 설정된 하동의 청학동과 비슷하다.
모운동은 옥동광업소 광산노동자와 가족들로 번성한 때도 있었다. 믿기지 않지만 무려 1만 명이 살았다니 옹색한 산동네가 아니라 ‘공중도시’였다. 당시 영월읍내에도 없었다는 극장을 비롯해 초등학교와 우체국도 있었다. 그러나 석탄산업합리화로 광산이 문을 닫으면서 모운동도 급속히 쇠락했다. 지금은 28가구에 35명 남짓 살고 있는, 잊힌 산골 마을이 되고 말았다.
속절없이 늙어가는 마을 풍경을 벽화와 꽃밭이 가리고 있다. 남아 있는 건물 외벽에 오리와 청개구리, 인어공주 등 동화 속 주인공들이 그려져 있다. 알록달록한 원색과 화사한 가을꽃으로 치장했지만 녹슨 세월의 흔적은 여기저기 녹아내린다. 옛 우편취급소는 폐허처럼 방치돼 있고, 펜션으로 이용하던 초등학교는 새 단장을 하려는지 운동장에 주방기기가 잔뜩 쌓여 있다.
그래도 고향마을 같은 아련한 향수와 이색적인 풍광 덕분에 최근 예능 프로그램 ‘짝’과 ‘운탄고도 마을호텔’을 촬영했다. 덕분에 외지인이 심심찮게 찾아오는데, 마을에는 그럴듯한 숙소는 말할 것도 없고, 어디나 흔한 카페 하나가 없다. 방송처럼 실제 호텔이 있는 줄 알고 온 사람들은 서운할 수밖에 없다. 녹화 후 방치되던 마을회관을 현재 실제 숙소로 개조하는 공사가 진행 중이다.
마을 뒤편으로 나가면 운탄고도와 이어진다. 석탄을 실어 나르던 고원 도로라는 뜻이지만, 최근엔 양탄자처럼 구름이 깔린 길이라는 의미로 해석한다. 일명 산꼬라데이(산골짜기) 길이라고도 하는데 곳곳에 광업소의 흔적이 남아 있다.
초입에 옥동광업소 동발(동바리) 제작소 건물이 폐허로 남아 있다. 동발은 갱도가 무너지지 않게 받치는 나무기둥이다. 조금 더 가면 수풀에 방치된 건물이 보이고, 바로 옆에 황톳빛 침출수가 흐르는 갱도가 보인다. 이 물을 근처 협곡으로 빼내 인공폭포를 만들었는데, 까마득한 계곡으로 물줄기가 떨어져내리며 암반을 붉게 물들였다. ‘황금폭포’라 이름한 이유다. 황금폭포 전망대 옆에는 탄차에 기대어 쉬는 광부상이 세워져 있다. 작품명 ‘휴식’이다.
모운동이 어떤 곳인지는 가보지 않고 알 수가 없다. 해발 550m로 아주 높은 곳이 아닌데도 '하늘 아래 첫 동네'라 부르는 이유는 마을로 가는 가파른 지형 때문이다. 마을 맨 위쪽에 옥광교회가 있다. 탄광이 번성할 때인 60년 전에 설립한 교회다. 문현진 목사는 4년 전 부임하던 날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위성사진으로는 평평하게 보이니까 이렇게 높은 줄 몰랐죠. 굽이굽이 올라오는데 진짜 마을이 있을까 생각되더라고요. 이 굽이 돌면 보일까, 저 굽이 돌면 나올까 세어보다가 결국 포기했습니다. 그렇게 마음을 비우고 드디어 도착했을 때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은 정말 ‘숲속의 요정마을’ 같았습니다. 어릴 적 시골에서 봤던 밤하늘 은하수를 수십 년 만에 다시 보는 것도 황홀했습니다. 외지인이 오면 마을 소개 겸 자랑도 하고 막 행복합니다. 평생 여기서 목회활동을 할 생각입니다.”
언제나 사고 위험에 노출된 광부 가족들이 마음을 기댈 곳은 교회만이 아니었다. 모운동에서 똬리를 틀 듯 연결된 도로를 따라 더 올라가면 만경사라는 사찰이 있다. 망경대산 정상 바로 아래다. 멋진 풍광을 바라본다는 뜻은 한 가지일 텐데, 산 이름과 절 이름이 살짝 어긋났다.
온갖 수려한 경치를 품은 사찰이니, 전각보다는 절 마당에서 내려다보는 풍광에 넋을 잃는다. 고랭지 채소밭 주위로 듬성듬성 민가가 흩어져 있고, 그 아래로 까마득히 남한강에 합류하는 옥동천이 뱀처럼 흐른다. 그 너머로는 소백산맥의 높고 낮은 산줄기가 수려하게 이어진다.
만경사는 바로 아래 망경산사에서 관리하고 있다. 대웅전이라야 처마가 낮은 단층 건물이 전부일 정도로 수수한 사찰이다. 대신 모운동처럼 평지를 이루고 있는 주변은 화사한 꽃밭으로 가꿔져 있다. 절을 지키는 비구니와 신자들의 정성 어린 손길이 느껴진다. 과꽃 맨드라미 해바라기 코스모스 등 평범한 가을꽃부터 꽃범의꼬리 마타리 족도리 설악초 용담 등 야생화까지 뒤섞여 천상의 화원이다. 호사스럽지 않으면서도 수수함이 묻어나는 정원이다.
만경사로 오르는 길 초입에 예밀리 마을이 있다. 산골과 어울리지 않게 ‘메종 드 예밀’이라는 레스토랑과 ‘와인족욕 체험장’을 운영하고 있다. 마을에서 포도 농사를 시작한 건 약 20년, 영농조합에서 와인을 생산한 지는 10년이 됐다. 짧은 기간임에도 품질이 좋다는 소문이 나면서 지금은 포도든 와인이든 물량이 달릴 정도로 유명해졌다. 족욕체험(1만5,000원)에는 와인 한 잔이 곁들여진다. 여행의 피로를 푸는 색다른 체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