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 많고 승부욕 강했던 일곱 살 소녀 리즈 트러스는 학교에서 열린 ‘모의 총선’에서 마거릿 대처 총리 역할을 맡았다. 선거 유세도 누구보다 열심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쓰라린 참패였다. “그때 나는 0표를 받았다. 나조차도 나에게 투표하지 않았던 거다.”
39년이 흘러 그 소녀는 압도적 지지를 얻으며 영국 보수당 대표이자 신임 총리로 선출됐다. 롤모델인 대처 총리에 비유되며 ‘제2 철의 여인’이라고도 불린다. 대처(1979~1990년 재임)와 테레사 메이(2016~2019년 재임)를 잇는 세 번째 여성 총리이기도 하다. 트러스는 그렇게 어린 시절 꿈을 이뤘다.
트러스에게는 ‘변신’ 혹은 ‘전향’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정치적 입장과 이념 성향이 좌에서 우로 바뀐 탓이다. 애초부터 보수주의자는 아니었다는 얘기다. 수학 교수 아버지와 간호사인 어머니는 오히려 좌파 성향에 가깝다. 트러스 자신도 옥스퍼드대 철학·정치학·경제학 융합학과(PPE)에 재학하던 시절에는 좌파 정치 지망생이었다. 중도좌파 성향의 자유민주당 열성 당원으로 활동하며 학생 정치조직 회장까지 맡았다. 1994년 브라이튼에서 열린 자유민주당 전당대회 연설에선 “우리는 사람이 누군가를 통치하기 위해 태어난다고 믿지 않는다”면서 ‘군주제 폐지’를 주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현재 그는 “왕실은 필수적”이라고 말한다.
트러스는 그로부터 불과 2년 뒤인 1996년 보수당에 입당했다. 대학 졸업 후에는 에너지회사, 통신회사 등에서 회계사로 일했고, 2000년 동료 회계사 휴 오리너리와 결혼해 자녀 2명을 뒀다. 그러는 사이 정치권에도 꾸준히 문을 두드렸다. 2001년 총선과 2005년 총선에 보수당 후보로 출마해 연거푸 고배를 마셨지만 당내에서 차곡차곡 정치적 입지를 다졌고, 결국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의 지원을 받으며 2010년 의회 진출에 성공했다.
그 이후로는 탄탄대로를 걸었다. 의원 생활 2년 만인 2012년 교육 담당 부장관에 발탁됐고, 2014년에는 환경장관으로 캐머런 내각에 참여했다. 2016년 출범한 메이 총리 정부에선 법무장관과 재무 수석부장관으로 일했다. 2019년 보리스 존슨 총리 시절에는 초기 국제통상장관을 맡아 브렉시트(Brexit·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이후 무역협상을 이끌었고, 2021년에는 외무장관에 취임했다.
정치 입문 이후 총리에 오르기까지 10여 년 정치 이력 또한 ‘변신’ ‘전향’이라는 단어로 압축할 수 있다. 트러스는 정치적 야심을 위해선 소신을 쉽게 철회했다. 브렉시트가 대표 사례다. 국민투표를 앞두고는 “유럽연합(EU)에서 탈퇴하면 비극이 될 것”이라며 강력히 반대했지만, 여론이 탈퇴로 기울자 “브렉시트는 판도를 뒤흔드는 새로운 기회를 제공할 것”이라며 말을 바꿨다. 지금은 ‘브렉시트 수호자’를 자처하고 있다.
트러스에 대한 세평도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영국 가디언은 “변신에 능한 사람(shapeshifter)”이라고 평했고, 일각에선 대세에 따라 움직이는 “풍향계”라고 깎아내리기도 한다. 공통적인 평가는 “출세 지향적 야심가”라는 데 모아진다. 경제전문지 포브스는 “시소를 타듯 이랬다저랬다 하는 트러스의 정치적 성향은 그의 믿음이 진실한지, 아니면 매번 편리함을 따른 것인지 의문을 갖게 한다”고 지적했다.
트러스는 부유층 감세, 에너지 가격 동결, 우크라이나 전쟁 지원 등을 내세워 보수당 당원들의 지지를 얻었다. 보수당 내에서도 강경 우파로 꼽히지만 경선을 치르면서 오른쪽으로 더욱 기울었다. 95%가 백인, 63%가 남성, 58%가 50대 이상, 80%가 중산층 이상인 보수당 당원에게는 최고의 선택이겠지만, 당이 아닌 나라를 이끌어야 하는 총리로서는 자질이 부족하다는 비판도 적지 않다.
존슨 정부에서 일했던 도미닉 커밍스 전 총리실 수석 보좌관은 “트러스가 존슨보다 나쁜 총리가 될 것”이라고 단언했다. 마크 스테어스 유니버시티칼리지런던 정책연구소장은 “트러스에게는 고든 브라운의 투지, 대처의 끈질긴 장기 비전이 부족하다”며 “그에게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맹목적 신념에서 다른 신념으로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전환할 수 있는 능력뿐”이라고 꼬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