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사계'는 18세기 북반구의 아름다운 도시 베네치아에 살던 이탈리아 작곡가 비발디가 자연의 계절별 특징을 음악으로 담아낸 세기의 명곡이다. 그런데 비발디가 묘사한 사계절이 전 세계가 기후변화로 몸살을 앓고 있는 현시점에도 과연 유효할까. 우리는 언제까지 이렇게 아름답고 완벽한 사계절을 향유할 수 있을까.
태풍 힌남노가 한반도를 빠져나간 6일 바이올리니스트 임지영과 사계2050프로젝트 오케스트라의 '사계 2050-잃어버린 계절' 연주회가 열렸다. 비발디의 '사계'가 중심 텍스트지만 기후변화로 달라진 지구 곳곳의 2050년을 음악 안에 녹여낸 '사계 2050(The Uncertain Four Seasons)'은 조금 다른 느낌의 음악이다. 세계적 디지털 디자인 혁신 기업인 AKQA가 주도한 이 프로젝트는 기후학자들이 예측한 각 지역별 기후변화 시나리오(RCP8.5)를 비발디의 '사계' 원곡에 적용, 데이터 사이언티스트, 인공지능(AI), 작곡가 휴 크로스웨이트의 협업을 통해 재탄생시킨 곡이다.
한국을 포함해 지금까지 전 세계 6개 대륙의 14개 도시 버전이 연주됐다. 제26회 유엔기후변화협약당사국총회에서는 릴레이 온라인 상영을 했다. 지역마다 다른 기후 데이터를 갖고 있어 소리로 전환된 각기 다른 자연을 보여주는데, 음악으로 전한 일종의 기후변화 미래전망 보고서인 셈이다. 2050년 서울의 사계는 지난해 10월 한 차례 공연됐다. 이번 두 번째 무대는 더욱 격해지고 빨라진 기후변화를 반영해 금관악기와 타악기가 편성에 더해졌다.
데이터에 기반해 달라진 계절의 특징을 묘사한 음악은 악보부터 충격적이다. 도시는 물에 잠겼고 땅의 생명을 상징하는 새의 지저귐은 사라졌다. 온난화 여파로 거세진 태풍의 세력은 섬뜩한 빗소리와 바람 소리로, 파괴된 자연과 서식지의 암울함은 불협화음으로 표현된다. '사계 2050'에 의하면 머지않은 미래, 우리의 계절은 더 이상 아름답지 않다. 1725년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탄생한 비발디의 '사계'는 수백 년간 풍요롭고 생명력 가득한 자연의 아름다움을 상징해 왔지만 이미 해수면 상승과 침수 위협을 받고 있는 베네치아의 2050년 '사계'는 서울보다 더 참혹할 수도 있다.
자연과 계절을 음악으로 남긴 작곡가는 비발디 외에도 많다. 특히 남반구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항구의 사계절을 담은 아스토르 피아졸라와 1년 열두 달의 서정을 노래한 차이콥스키의 '시즌스', 비발디의 ‘사계’를 2012년, 2022년 버전으로 다시 작곡하고 연주한 막스 리히터의 '리컴포즈드' 등이 대표적이다. 이 중 바이올리니스트 기돈 크레머가 현악 합주 형태로 러시아 작곡가 레오니드 데샤트니코프에게 편곡을 의뢰한 피아졸라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사계' 버전은 비발디의 '사계'와 함께 한 무대에서 자주 연주된다. 비발디를 오마주하며 유머를 곁들인 악곡 구성도 재미있지만 북반구와는 위도와 경도가 다른 남반구의 계절 순서, 비발디 시대 베네치아의 햇살과는 전혀 다른 항구 도시의 어두운 정서, 여기에 ‘탱고’라는 강렬한 음악 언어가 클래식 음악에 훌륭하게 접목된 매력적인 곡이다.
이렇게 20세기 남반구 한 도시의 표정을 담아낸 피아졸라의 음악은 이색적이고 세련된 무드의 작품으로 재탄생했다. 그렇다면 '사계 2050' 프로젝트처럼 기후변화 데이터를 적용한 21세기 도시들의 사계절은 어떤 음악으로 들리게 될까. AI가 편곡한 '사계'가 지나치게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면 2012년, 2022년에 ‘사계’를 재해석했던 리히터의 음악은 어떨까. 그가 2032년의 '사계'를 구상한다면 어떤 음악을 만들게 될까. 우리에게 익숙하고 당연했던 계절별 특성 묘사 중 실제적으로 무엇이, 어떻게 바뀔까. 우리가 아는 그 날씨를 계속 들을 수 있을까. 우리의 미래 예술은 이렇게 암울해질 수밖에 없을까.
프란치스코 교황은 "신은 항상 용서하시고, 우리는 때때로 용서하지만 자연은 절대 용서하지 않는다"고 했다. 더 이상 자연의 심판을 받지 않으려면 우리가 달라져야 한다. 기후변화 데이터와 시나리오에 기반한 AI의 편곡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 현 상황의 숫자를 대입시킨 것이지만 긍정적 데이터 변화를 이끌어내는 주체는 우리 인간이다. 지금까지는 거저 주어진 자연의 아름다움을 묘사하고 서술하고 연주하는 감상자의 입장이었다면 이제는 그 자연을 지켜내고 좋은 음악을 듣기 위한 적극적 창작자로서 움직여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