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워할 때 입 벌리지 말라" 경고 수년째…흑인 마을 상수도에 무슨 일이

입력
2022.09.04 20:50
수년째 수돗물 오염 시달리는 미시시피 잭슨시
주민 82% 흑인… 공화당 주정부, 예산 지원 차별
인종차별→기반시설 부실→기후재난에 취약

수도꼭지를 돌리자 녹물인지 흙탕물인지 모를 혼탁한 오염수가 콸콸 쏟아졌다. 한참을 틀어놓아야 물 색이 약간 맑아진다. 주민들은 그 물로 빨래를 하고, 몸을 씻고, 때론 마시기도 한다. 미국 미시시피주(州) 주도 잭슨시가 수년째 겪고 있는, 도무지 믿지 못할 ‘물난리’다.

“께름칙하지만 어쩔 수가 없다. 자가용이 없어서 주정부가 배급하는 생수를 받으러 가기 힘들다.” 잭슨시 서부 지역에 거주하는 70세 흑인 남성은 쓴웃음을 지으며 3일(현지시간) 영국 BBC방송에 말했다.

"물 끓여 마시고 샤워할 때는 입 벌리지 말라"

최근 미시시피주 일대를 강타한 홍수로 잭슨시에서 ‘식수 대란’이 며칠째 계속되고 있다. 밀려든 빗물에 상수도 정수 처리 시설이 완전히 망가지면서 수돗물을 생활용수로 사용할 수 없게 된 탓이다. 시민 16만 명 중 15만 명이 마실 물이 없어 불편을 겪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잭슨시 주민들은 상수도 오염 문제가 하루이틀 일이 아니라고 입을 모은다. 정수 시설이 낡아 이미 수년째 녹물이 나오고 있는데, 이번 홍수로 인해 사태가 악화됐을 뿐이라는 얘기다.

시각예술가인 한 주민은 “더러운 수돗물이 나온 지 1년 반이 넘었다”며 “이젠 역류할까 겁나서 변기 물을 내리기도 조심스럽다”고 일간 워싱턴포스트에 말했다. 저소득층 식료품 지원 프로그램 대상자인 한 30대 여성은 “생활 지원금 대부분을 생수를 사는 데 쓴다”며 “물값만 매달 200달러 이상 든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주민들은 “물을 끓여서 마시라”거나 “샤워를 할 때는 입을 벌리지 말라”는 경고를 수년째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고 있다고 한다.


주민 82%가 흑인... 인종차별→안전망 부실화

잭슨시는 정수 시설 보수 비용으로 20억 달러(약 2조7,000억 원) 이상 필요할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미시시피 주정부는 예산 지원 요청을 줄곧 묵살해 왔다. 이를 두고 주정부가 잭슨시를 일부러 차별하는 것 아니냐는 의혹도 불거지고 있다. 공화당이 장악한 주정부 및 주의회와 달리, 잭슨시는 주민 82%가 흑인인 데다 민주당 지지세가 강한 지역이기 때문이다. 애런 뱅크스 잭슨시 의원은 “주 예산은 잭슨시 이외 다른 도시의 기반시설에만 지원됐다”며 “그 피해는 결국 가난한 유색인종에게 돌아간다”고 지적했다.

백인 표심을 주로 공략하는 공화당 주정부가 유색인종 지역을 소외시키는 탓에 기반시설은 더 부실해지고, 그로 인해 갑작스러운 기후재난에 안전망은 더욱 취약해졌으며, 유색인종 주민들의 생활도 더욱 곤경에 빠지는 악순환이 잭슨시에서 벌어지고 있다. 지난해 겨울 폭풍이 닥쳤을 때도 잭슨시는 수도관 동파로 6주 넘게 수돗물 공급이 끊겼는데 이웃 도시들보다 그 기간이 훨씬 길었다. 에드먼드 메렘 잭슨주립대학 도시 계획 및 환경 연구 교수는 “잭슨시의 열악한 기반시설에 관심과 자금이 투입되지 않는 요인은 바로 뿌리 깊은 인종차별”이라고 비판했다.

백악관은 연방재난관리청(FEMA)을 통해 잭슨시에 필요한 예산의 최대 75%를 지급하겠다고 약속했다. 낙후된 기반시설 확충은 조 바이든 대통령이 역점을 둔 정책이기도 하다. 하지만 역시 걸림돌은 연방정부가 지원한 예산이라도 주정부를 통해 배분된다는 사실이다. 잭슨시 환경단체인 ‘협력 잭슨’의 칼리 아쿠노 국장은 “연방 정부는 공화당이 통제하는 주지사와 입법부를 우회해 잭슨시에 예산을 지원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며 “잭슨시 사례는 유사한 문제를 겪고 있는 많은 지방자치단체에 ‘탄광의 카나리아’가 될 것”이라고 진단했다.

김표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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