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중국 조선족자치주, 시진핑 '소수민족 동화 정책'에 말라 간다

입력
2022.09.05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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옌볜조선족자치주 성립 70주년 르포


"다른 도리가 뭐 있습니까. 중국의 큰 흐름이라는 게 있으니 그러려니 하는 거죠."

이달 2일 중국 옌볜조선족자치주의 옌지시에서 만난 50대 조선족 김진혁(가명)씨의 말이다. "조선족자치주의 정체성이 중국의 소수민족 동화 정책 탓에 점점 흐려지고 있는 게 서운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김씨는 이같이 답했다. 그의 목소리엔 체념이 깔려 있었다. 조선족 정체성을 지키겠다는 의지를 아무리 다져 봐야 중국 정부의 '힘' 앞에선 소용없다는 학습된 체념이다.

중국의 행정 구역은 4개 직할시, 5개 자치구, 22개의 성(省) 등으로 이뤄져 있다. 자치주는 성의 하급 단위로, 옌볜조선족자치주를 포함해 30개가 있다. 중국의 유일한 조선족자치주인 옌벤조선족자치주는 1952년 9월 3일 설치됐으니, 올해가 성립 70주년이다(성립 당시엔 조선족자치구였다).

북한, 러시아와 국경을 맞댄 지린성 동부에 위치한 옌벤조선족자치주는 옌지, 투먼, 훈춘, 룽징, 허룽 등 6개 시와 왕칭현, 안투현 등 2개 현을 아우른다. 총면적은 4만2700㎢, 인구는 2021년 말 기준 202만9,400명이다. 남·북한과 별로 다르지 않은 언어와 문화를 공유하며, '중국 속의 한민족'이라는 독특한 문화권을 유지해왔다.

그러나 시진핑 국가주석 시대 들어 거세지는 '중화 민족주의'의 칼바람은 조선족자치주의 문화와 경제를 서서히 말라 가게 하고 있다. 중국 정부 방침에 따라 조선족 언어 사용이 제한되고 조선족자치주만의 경제권 형성도 실현이 불투명해졌다. 성립 80주년을 기약하기도 어려운 지경으로 내몰리고 있다.

◇'한글 우선'에서 '중국어 우선'으로

성립 70주년을 하루 앞둔 2일 옌지 곳곳에는 "조선족자치주 70주년을 열렬히 축하합니다", "습근평(시진핑) 시대, 중국 특색 사회주의 기치를 높이기 위해 분투하자"는 등의 현수막이 내걸렸다. 옌지 주민들이 자주 찾는 진달래공원과 연길대교 앞 광장에선 한복과 부채춤 등 조선족의 문화를 앞세운 전야제가 한창이었다.

옌지의 대표적 번화가인 옌볜대학교 앞. "잘 낫는 약국", "말뚝 곱창", "홍대 포차" 같은 한글(조선어) 간판 수백 개가 한눈에 들어왔다. 윤동주 시인의 '별 헤는 밤'에서 따온 듯한 '병 헤는 밤'이란 이름이 붙은 술집도 있었다. 간판만 보면 한국인지 중국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그러나 현장의 공기는 서서히 바뀌고 있었다. 거리에서 만난 조선족들은 "지난달부터 시내를 중심으로 대대적인 간판 교체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고 전했다. 이전까진 한글을 먼저 쓰고 중국어를 병기했다면, 최근 교체된 간판들은 중국어가 먼저 나오고 한글이 뒤에 나와야 한다는 것.

중국 정부는 지난달 25일 조선어언문자공작조례실시세칙을 발표했다. 이전 세칙은 한글이 왼쪽, 중국어가 오른쪽으로 되어 있었으나, 개정 세칙에선 정반대로 바뀌었다. 가로 읽기를 한다고 가정하면 '중국어 퍼스트'가 새 원칙인 셈이다. 공공 기관·기업·자영업자의 직인, 현판, 간판, 광고, 도로 표지판 등 사실상 눈에 보이는 모든 시각물이 개정 세칙 적용 대상이다. 최근 교체한 티가 나는 간판과 교통 표지판은 실제 모두 '중국어→한글' 순으로 적혀 있었다. 1952년 자치구 성립 이후 70년간 이어진 '한글 우위'가 무너진 것이다.


◇"조선족 학교도 중국말로 수업"

갑작스러운 표기법 변경을 조선족 청년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옌볜대 학생에게 물으려 했으나, 몇 마디를 나누기도 전에 치안 당국 직원으로 추정되는 남성이 나타나 학생의 팔을 잡아 끌었다. 필자와 대화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렇지 않아도 옌지시 도착한 직후부터 5, 6명의 남성이 필자와 10m 거리를 유지하며 끈질기게 따라다니던 터였다. 남성은 학생을 멀리 떨어진 곳으로 데려가 필자와 무슨 대화를 했는지 추궁하는 듯했다.

중국 당국은 조선족 사회가 외부 사회와 접촉하는 것에 유난히 신경을 곤두세운다고 한다. 익명의 전문가는 "중국 소수민족 중 상당수는 이미 한족에 동화된 반면 조선족은 그렇지 않은 편이라 경계하는 것"이며 "조선족 사회엔 한국인과 동질성을 느끼는 구성원이 많다"고 말했다. 조선족이 한국을 '고국'으로 여길 가능성을 중국이 걱정한다는 뜻이다.

한글뿐 아니라 조선어도 중화 민족주의의 위세에 억눌리고 있다. 조선족자치주 룽징(용정)시에서 조선족과 함께 15년째 사업을 하고 있는 교민 윤태영(가명)씨의 말. "조선족들은 우리 예절을 가르치기 위해 한족 학교보단 조선족 학교를 선호해왔다. 하지만 몇 년 전부터 조선 족학교에서도 중국어 사용이 의무화하면서 조선족 학교나 한족 학교나 별반 차이가 없어졌다. 지금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이 성인이 되는 10~20년 뒤엔 한국인과 원활하게 대화하기 어려워질지도 모른다. 걱정이다."

중국의 소수민족 정책의 핵심은 지난 7월 신장자치구를 방문한 시진핑 주석의 발언에 잘 녹아 있다. 시 주석은 "중국은 다민족 국가이며 다양성과 통일성은 우리의 가장 큰 특징"이라면서도 "신장 민족 문화의 뿌리는 중국 문명에 있다"고 했다. 다양한 민족의 존재 자체는 인정하지만 중화 민족이라는 하나의 뿌리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소수민족이 '동화 대상'임을 못 박은 것이다.

◇"기업도 학교도 없고"...떠나는 조선족


인구 분산과 감소로 "조선족이 다스린다"는 뜻의 조선족자치주의 존립 근거 자체도 흔들리고 있다. 자치주 성립 당시 70.5%를 차지하던 조선족 비율은 2020년 기준 30%로 뚝 떨어졌다. 자치주 인구는 2000년 192만 명을 찍은 이후 20년 넘게 지속적으로 감소해 현재는 170만 명 수준이다. 반면 30%를 밑돌았던 한족 비중은 66%까지 늘었다. 한족이 조선족보다 두 배 이상 많은 셈이다.

조선족의 자치주 이탈은 일자리 부족 탓이 크다. 김진혁씨는 "중국 중앙 정부가 조선족자치주에 기업을 유치하는 데 소극적"이라며 "기업이 없으니 일자리가 없고, 일자리가 없으니 젊은 친구들은 밥벌이를 위해 대도시로 갈 수밖에 없다"고 했다. 소수민족의 분화를 바라는 중국으로선 애써 이곳에 기업을 유치할 필요가 크지 않다는 얘기다.

옌볜과학기술대학 역시 조선족의 아픈 기억이 새겨진 곳이다. 옌지시 정부는 1992년 재미교포 교육가 김진경 전 총장과의 협력을 통해 중국 최초의 외국인 설립 대학인 옌볜과기대를 개교했다. 조선족 젊은이들에겐 서구식 교육을 받고 다양한 과학 분야로 진출할 수 있는 새로운 통로가 열린 셈이었다.

중국 정부는 학교 부지 임차 계약 기간(30년)이 끝나자마자 계약 연장을 거부했다. 옌볜과기대의 기독교 문화에 대한 거부감에 더해 소수민족 동화 흐름과 어긋난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외국인 설립 학교는 한족만이 운영할 수 있다"는 중국의 새 정책에 따라 과기대는 지난해 문을 닫았다. 3일 찾아간 과기대 본관에 걸린 만국기는 너덜너덜한 채 방치돼 있었다. 조선족 학생들로 붐볐을 교정 곳곳엔 잡초가 무성했다.

옌지시 정부는 올해 70주년 기념식을 철저히 비공개로 치렀다. 베이징에서 활동하는 한 조선족 사업가는 "중화 민족주의가 강조되어야 할 20차 당대회(오는 10월 중순)를 앞두고 소수민족 정체성이 강조되는 것을 크게 바라지 않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중국 관영 언론인 신화사도 3일 조선족자치주 성립 70주년을 맞아 다채로운 문화 행사가 열렸다는 짤막한 보도만 냈다. 신화사는 "행사장 스크린에 '중화민족 공동체 의식을 구축하자'라는 구호가 특히 눈길을 끌었다"고 보도했다.




옌지·룽징 조영빈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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