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어릴 때부터 운동을 했잖아요. 그래서 (구단 사무국, 선수단 모두와) 대화가 되는 것 같아요.”
한국프로농구(KBL) 고양 오리온스를 인수한 고양 캐롯 농구단의 허재(57) 대표이사는 자신의 역할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캐롯 농구단이 8월 31일부터 이달 3일까지 강원 태백 전지훈련에 나선 것이 그의 강점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다. 지난 1일 전지훈련지에서 만난 허 대표은 “신생구단이 놓칠 수 있는 부분을 챙기려 한다”며 “코로나19 때문에 선수단이 일본 전지훈련을 못 갔는데, 늦게나마 국내에서라도 산악훈련 겸 워크숍을 떠나자는 결정을 내렸다”고 말했다.
훈련 장소에 나타난 허 대표를 보니 “대화가 된다”는 그의 말이 실감이 났다. 그는 이날 8.2㎞ 산악구보의 출발지인 어평재휴게소에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등장해 선수단과 함께 몸을 풀었다. 준비운동을 하는 와중에 선수 한 명 한 명의 이름을 부르며 농담 섞인 잔소리를 늘어놓기도 했다. 며칠 전 고려대와의 연습경기에서 부상을 당한 선수에게는 “상황을 보고 들어 가야지, 가드라는 놈이 그렇게 무턱대고 (상대방과) 부딪히면 어떡해”라며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선수단 사이에 섞여 산악구보에 동참한 허 대표는 출발 전 “5분이라도 뛸 수 있을지 모르겠다”던 엄살과 달리 약 10분간 오르막길을 내달렸다. 대표이자 대선배의 솔선수범에 김승기 감독과 코칭스태프도 땀을 흘리며 무리에 뒤섞여야 했다.
특유의 스킨십을 과시했지만 허 대표는 자신의 위치를 잊지 않았다. 현장 운영은 감독 고유의 권한이라고 선을 그었다. 안양 KGC인삼공사에서 영입한 전성현이 대표적인 사례다. 허 대표는 “전성현과 (아들인) 허웅(전주 KCC)이 같은 보수 총액(7억5,000만 원)을 받는데, 김 감독이 전성현을 택했다”고 전했다. 영입 물망에 아들의 이름이 오르내려도 감독의 선택에 개입하지 않았다는 의미다. “2년차에 문성곤(KGC), 3년차에 허훈(상무 농구단)을 영입하겠다”는 김 감독의 구상에 대해서도 “다른 팀들이 가만히 있을까?”라며 웃기만 할뿐 사견은 덧붙이지 않았다.
이는 김 감독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허 대표는 “김 감독은 플레이오프 무패로 우승(2020~21시즌 10승 전승)을 한 감독”이라며 “본인이 새로운 곳에서 또 한 번 꿈을 이루고 싶다는 생각이 매우 강하고, 열정적으로 선수들을 지도하고 있다”고 캐롯의 초대 사령탑을 치켜세웠다.
믿음직한 현장 지휘관을 둔 덕분에 그는 좀 더 큰 그림에 집중할 수 있게 됐다. 허 대표는 8월 25일 창단식에서부터 “캐롯을 KBL 최고 인기구단으로 만들겠다”고 공언해 왔다. 그는 “냉정하게 말해서 올해 캐롯은 우승권은 아니다”며 “대신 새로운 선수를 스타로 키워내 고양 팬들이 찾아 올 수 있게끔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가 주목하고 있는 ‘흙 속의 진주’는 5년차 조한진(포워드)이다. 허 대표는 “고려대와의 연습경기를 봤는데 볼 터치감이 좋더라”며 “감독도 많은 공을 들이고 있다”고 귀띔했다.
허 대표의 말대로 새 얼굴의 등장은 농구 팬들을 설레게 한다. 그러나 반대로 팀의 프랜차이즈 스타를 잃은 팬들은 허탈감에 빠지기도 한다. 고양 팬들은 캐롯의 전신인 오리온스의 ‘상징’ 김병철 코치가 새 구단에 합류하지 못하자 강한 아쉬움을 드러냈다. 이에 대해 허 대표는 긴 시간을 들여 조심스럽게 입장을 전했다. “물론 팬들이 아쉬워하는 부분이 있을 거예요. 그런데 감독이 선임되면 코칭스태프도 조직적으로 움직여요. 감독이 코트에서 놓친 부분을 오랜 시간 호흡을 맞춰온 코치들이 캐치하는 상황이 꽤 많기 때문입니다. 이 상황에서 김병철 코치까지 합류하기에는 구단에서도 벅찬 면이 있는 거죠. 병철이도 내 고등학교 후배예요. 병철이가 미워서 함께 하지 못하게 된 게 아니라는 걸 팬들이 이해해줬으면 합니다.”
허 대표가 바라는 구단의 성적이 궁금했다. 그는 현실적인 목표와 은근한 기대감을 모두 내비치며 웃었다. “냉정하게 말해서 목표는 (우승이 아니라) 플레이오프 진출이죠. 그런데 운이 좋으면 우리가 확 치고 올라갈 수도 있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