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을 쇠고 나면 이혼이 급증한다는 말이 있다. 제사상 차리기를 둘러싼 가족간 갈등이 큰 요인이다. 하지만 지금보다 더 격식을 차렸을 조선시대의 양반가에서도 간소하게 지내고 가족간에 화기애애하게 보냈다는 기록이 공개돼 주목받고 있다.
"먼저 외가의 추석 차례를 지낸 후, 집의 사당에서 추석 차례를 올렸다." 조선중기 문신이자 계암 김령(1577~1641)이 400년 전인 1621년 추석에 남긴 일기의 한 대목이다. 친가를 먼저 해야 한다는 공식은 뒤에 만들어 낸 것으로 보인다.
1일 한국국학진흥원이 공개한 계암일기, 조성당일기 등 조선중기~후기 명절의 모습을 담은 5개의 문헌에 따르면 1600년대 당시 경북 안동과 예천, 상주 등지의 양반가에서는 친족이나 성별의 구분 없이 조상을 모셨다는 사실이 잘 드러난다.
성묘 차 방문한 산소에서 차례를 지내는 등 제례 역시 간결했다. 차례 따로, 성묘 따로 하는 지금과 사뭇 달랐다. 벌초도 외가와 친가가 번갈아 했다.
조선중기의 학자이자 문신인 초간 권문해(1534~1591)는 1582년 추석 초간일기에 "용문(龍門·경북 예천군 용문면)에 있는 선조 무덤에서 제사를 지내서 어머니를 모시고 산소에 올라갔다"고 기록했다.
월천 조목(1524~1606)의 제자인 조성당 김택룡(1547~1627)의 일기에서는 친가와 외가가 같은 조상의 묘를 벌초하고 남성이 제사 음식을 준비하는 모습도 남아 있다. 김택룡은 지난 1616년 추석 조성당일기에 "조카를 시켜 조부의 묘소를 벌초하고 음식을 올리도록 했다"라고 기록했고 이듬해 추석에는 "우리 집 외조부모 제사를 상방(上房)에서 지냈다. 나는 술과 과일을 마련해 생질, 조카, 손자와 선영에 잔을 올려 절하고 또 제물을 나눠 장인 산소에도 절했다. 누이의 아들 무리가 벌초했다"라고 적었다.
이 같은 기록은 후대인 18세기에도 나타났다. 조선후기의 학자인 청대 권상일(1679~1759)은 1745년 추석 일기에 "시냇물이 불어나 건너기 어려워 산소에 성묘하러 갈 수가 없어 해가 저문 뒤에 손자와 아우가 술과 포를 조촐하게 갖춰 성묘하고 돌아왔다"라고 기록했다.
이처럼 비교적 간소하게 지내던 조선시대 제례문화가 왜 친가 외가를 구분하고, 격식을 따지게 됐을까. 한국국학진흥원은 조선후기 가례(家禮)가 확산하면서 양반가에 사당이 건립되고 제례의 순서와 제사음식의 조리법과 배치까지 정형화된 데 이어 신분제가 흔들리면서 생겨난 폐습으로 보고 있다.
조선 초기 7%가량이던 양반 비율은 조선 말에 70% 이상 급증했다. 평민이나 보니 등이 양반으로 신분을 세탁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제사를 지내지 않던 계층에서 제사문화를 받아들이면서 대혼란이 빚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기록들은 당시 양반가가 성별이나 지위에 따른 형식에 얽매이지 않았고 온 가족이 협력해 제례도 간소하게 지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김미영 한국국학진흥원 수석연구위원은 "벌초할 때 술과 과일, 포를 조촐하게 가져가서 성묘한 게 옛 추석의 모습"이라며 "현대에는 벌초와 차례 성묘를 모두 각개로 보고 세 번이나 봉사하는데 이는 원형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제례 형식의 원형 자체는 간단했고 친족 구분 없이 상당히 유동적이고 합리적이었다"라며 "후대로 내려올수록 복잡해지면서 유교문화가 편협하고 형식만 중시한다는 오해를 받고 있어 16~17세기의 모습을 본 지금시점에서 되묻지 않을 수 없다"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