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년 진보 통념 뒤집는다... "불평등 확대, 적폐 탓 아니다"

입력
2022.09.02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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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병천 소장,  '좋은 불평등' 출간
"진보 경제학, 진영론에 사로잡혀" 
"수출 대박으로 불평등 확대, 금융위기 때 불평등 줄어"

“한국의 불평등 확대는 재벌, 신자유주의, 비정규직 확대 때문이란 게 진보 진영의 오랜 통념이었다. 요컨대 적폐 세력 탓이라는 얘기였다. 하지만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

더불어민주당 정책통인 최병천 신성장경제연구소 소장이 도전하는 것은 진보 진영 담론을 거의 20여 년간 지배해온 불평등에 대한 통념이다. 보수가 분배 문제, 즉 불평등엔 관심이 없었던 반면, 진보 진영이 불평등 문제에 천착하긴 했으나 잘못된 통념을 지녔기 때문에 정책 처방도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는 판단에서다. 요컨대 문재인 정부가 불평등을 줄이기 위해 펼친 최저임금 인상 및 소득주도성장(소주성)은 “진보 집단 지성의 집단 오류”라는 게 최 소장의 진단이다. 비정규직 정규직화, 종합부동산세 인상 등도 마찬가지다. 문재인 정부는 진보정당, 시민단체, 진보언론이 1997년 IMF 외환위기 이후부터 주장한 경제정책을 과감히 실현했으나 5년 만에 교체됐다. 그가 보기에 진보 경제학 25년의 '총체적 실패'에 다름없다.

최 소장이 신간 '좋은 불평등'에서 진보의 통념을 뒤집기 위해 들고 나온 것은 110개에 이르는 방대한 데이터다. 팩트를 통해 제시하는 것은 한국의 경우 수출 대박으로 수출ㆍ투자ㆍ고용이 증가하면 불평등이 확대됐고 금융위기가 닥쳤을 때는 불평등이 줄었다는 점이다. 한마디로 전자는 '좋은 불평등'이었고, 후자는 '나쁜 평등'이었다. “불평등은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다. 불평등을 줄이려는 정책이 경제성장을 작살낼 수도 있다”는 주장이다. 불평등 완화가 절대선이라는 통념을 뒤집고 불평등과 경제성장을 더 복합적으로 사고해야 한다는 얘기다. 오랫동안 진보 진영에 몸담아온 그가 도발적 주장으로 가득한 책을 내고 진보 경제 담론 깨기에 나선 셈이다.


“진보경제, 냉전좌파 사고에 사로잡혀”

-진보경제학, 뭐가 문제인가.

“태생부터 박정희 경제정책의 안티테제(반대 의견)였다. 박정희 대통령이 수출, 대기업, 제조업을 추진하니 저항운동 차원에서 내수, 중소기업, 임금 확대를 주장했다. 사실상 저임금, 고용 불안, 짧은 근속기간을 장려한 것과 마찬가지다. 또 계급론적 사고에 갇혀 부자의 성공을 약탈의 결과로 봤다. 그러니 해법도 부자를 다시 약탈해 하위 계층에 나눠주는 것이다.”

-불평등 완화에 역할을 하지 않았나.

“경제성장(수출ㆍ투자ㆍ고용) 속에 임금 격차가 커지는 건 '좋은 불평등'이다. 대기업이 성장하면 덩달아 납품업체도 성장하듯 장기적으로 낙수효과가 발생한다. 경제가 후퇴하며 불평등이 커지는 '나쁜 불평등'도 있다. 경제에서는 불평등, 수출, 성장, 투자, 고용이 모두 중요한데 진보세력은 불평등 해결이 '진보의 미션'이라고 생각한다. 현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문재인 정부 소주성이 성공? 정신승리”

-문재인 정부 소주성은 어땠나.

“소주성 정책은 나쁜 불평등을 초래했다. 최저임금을 16.4% 인상한 2018년 취업자 규모 증가는 9만7,000명이었다. 우리나라 연평균 취업자 증가가 40만 명인 걸 감안하면 고용 쇼크가 맞다. 대표적인 불평등 지표인 가계동향조사에서도 가난할수록 소득이 줄고, 부유할수록 소득이 늘었다.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다.”

-다른 경제정책은 어떻게 평가하나.

“코로나19 대응은 잘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성장률 저하가 가장 적었다. 아쉬운 것은 역시 부동산이다. 2018년부터 2021년까지 주택분 종합부동산세를 14.3배 늘렸다. 왕정 사우디아라비아나 공산주의 중국도 하기 어려운 일이다.”

-진보 학계에선 소주성이 성공했다는 주장도 여전하다.

“소주성을 폐기한 건 문 대통령이다. 2020년부터는 소득주도성장이라는 용어를 쓰지 않았다. 민주당도 지난달 24일 중앙위원회에서 당 강령에 있던 소주성을 뺐다. 민주당이 유능한 경제정당으로 나아가는 게 중요한지 자화자찬에 정신승리하는 게 중요한지 판단해야 한다.”

최 소장은 “불평등 원인을 정확히 진단해야 처방도 틀리지 않는다”고 거듭 강조했다. 불평등 확대는 재벌ㆍ신자유주의ㆍ비정규직 확대 탓이 아니라 수출 변화에 따른 상위 계층의 소득 변화 때문이다. 가령 노무현 정부의 불평등 확대는 중국의 급성장에 따른 한국 대기업의 수출 대박 때문이었다. 반대로 이명박 정부 시절에는 임금 격차가 줄었는데, '미국발 금융위기’로 수출이 쪼그라들었기 때문이다.

불평등 완화를 위한 최저임금 인상 정책이 실패한 이유도 진단이 잘못됐기 때문이다. 최저임금 1만 원 캠페인에 동조한 이들 중에는 “시급 1만 원도 못 주는 사업장은 망해야 싸다”는 말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3대 저부가가치 산업에 종사하는 이들이 37.3%다. 약 1,000만 명가량이 일자리를 잃어도 된다는 얘기다. 최저임금 인상은 '을과 을'의 싸움을 가져왔다. 특히 한국 사회 진짜 빈곤층은 노동조합이 아니라 대한 노인회에 압도적으로 많다. "진보정당은 노동운동 요구에는 관심이 많지만, 노인 빈곤 문제에 관심이 적다"는 게 최 소장이 아쉬워하는 대목이다.


“용비어천가, 좋은 세상 못 만들어”

최 소장이 진보진영 내에서 불편한 진실을 말하는 '악마의 대변인' 역할을 자처한 것은 “역사의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기 위해서”다. 그는 “용비어천가를 부르면 나중에 한자리할 수는 있겠지만, 좋은 세상을 만들 수는 없다”고 했다. “미국 민주당, 독일 기민당, 스웨덴 사민당은 모두 경제적 유능함으로 장기 집권했다”는 그는 '유능함'을 수차례 입에 올렸다.

-진보경제는 어떻게 해야 하나.

“윤석열 정부보다 좌파라서, 윤석열 정부보다 대기업을 잘 때려잡아서, 윤석열 정부보다 증세를 잘해서가 진보의 차별화가 되어선 안 된다. 윤석열 정부나 국민의힘이 유능한 세력이라고 보지 않는다. 좌파라는 걸 티 낼 게 아니라 경제에서 유능한 걸 입증하면 충분하다.”

-그런 사례가 있나.

“바이든 정부도 최근 반도체ㆍ배터리 산업 지원법을 통과시켰다. 우리는 왜 그렇게 하면 안 되나. 스티브 잡스, 일론 머스크, 마크 주커버그가 사람들을 착취해서 성공했나. 한국 진보는 우선 기업부터 재평가해야 한다.” 최 소장은 “국가 경쟁력 강화를 위해 안보ㆍ대기업 협력 강화에 힘쓰고, 계층 간 사다리를 놓기 위해 '기업에 필요한' 교육을 확대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노인빈곤 문제를 개혁하기 위해 연금정책을 손봐야 한다”고도 했다.

최 소장은 노동운동에 투신해 공장 노동자 생활을 했다. 민주노동당 등 진보정당에서 오래 활동하다가 2012년부터 민주당에 몸담아 박원순 전 서울시장 정책보좌관, 민주당 싱크탱크인 민주연구원 부원장 등을 지냈다. 친정인 민주당과 이재명 대표를 향해서도 뼈 있는 말을 남겼다. “반도체, 배터리, 바이오, 우주항공, 전기차 산업 육성과 지원에 나서야 한다. 재벌은 점진적으로 개혁하되 대기업의 전략적 산업은 팍팍 밀어줘야 한다. 억강부약(抑强扶弱ㆍ강한 자를 누르고 약한 자를 도와줌)이 아니라 부강부약 경제학을 선택해야 한다.”

정지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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