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고위 공직자는 연방수사국(FBI)의 기밀정보 취급방법을 브리핑 받고 기밀유지 서약서에 서명한다. 보안서약에는 재직 중 주고받는 구두통신은 물론 기밀표시가 없는 모든 정보가 포함된다. 이런 보안 문제로 정치적 시련을 겪은 대표적 인물이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과 데이비드 퍼트레이어스 전 중앙정보국(CIA) 국장이다.
2009년 국무장관에 오른 클린턴은 정부 이메일 대신 자택 서버에 연결된 사설 이메일을 사용했다. 정부 지침을 명백히 위반한 이유는 편의성을 앞세운 결과였다. 하필 2015년 대선출마 선언을 앞두고 해킹과 의회의 벵가지 영사관 피습 청문회에서 이런 사실이 공개됐다. 재직 중 주고받은 이메일의 반환을 요구받자 3만 건은 인쇄본으로 국무부에 전달하고 나머지 3만여 건은 영구 삭제했다. 클린턴은 기밀 표시된 이메일은 없다고 했으나 거짓이었다. 더구나 고위 공직자가 주고받는 문서들은 표시가 없어도 모두 기밀로 간주되고 이런 정보가 노출, 분실될 가능성만 있어도 보고 의무가 발생한다.
결국 논란 속에 진행된 국무부, FBI 조사에서 클린턴의 기밀표시 이메일은 110건으로 파악됐다. 이 가운데 2급기밀은 65건, 1급기밀은 22건에 달했다. 보안문서의 기밀표시를 떼고 팩스로 송신하는 등 그와 보좌진이 기밀정보를 부주의하게 취급한 사실도 인정됐다.
현재 백악관 기밀문서 유출로 곤경에 처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과 동일한 논리의 비판이 클린턴에게 가해졌다. 정보원의 생명을 위험에 빠뜨리고 정보를 취득한 방법이 노출됐을 위험이 있다는 것이었다. 더구나 미 연방법은 기밀 유출 의도와 무관하게 기밀을 부주의하게 다루는 중과실만 인정돼도 처벌하도록 규정했다. 국가기밀 보호 자체가 중대한 사안인 만큼 의도를 중시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당시 FBI와 법무부는 기밀의 유출 의도가 없었다며 클린턴을 연방법 위반 혐의로 기소하지 않기로 최종 결정했다. 봐주기 결정인 것은 정치적 비판을 떠나 법률적으로도 명백했다.
불륜 사실이 폭로돼 내리막길을 걸었던 퍼트레이어스 전 CIA 국장은 클린턴보다 경미한 기밀문제로 기소돼 유죄 판결을 받았다. 테러와의 전쟁 영웅인 그는 공화당에서 대권주자로 영입을 추진했을 만큼 대중적 인기가 높았다. 하지만 전기작가와의 불륜사실이 드러난 이후 법정에도 서야 했다.
그에게 적용된 죄목은 여성작가에게 기밀이 포함된 문서를 열람할 수 있게 하고, 자택 서재의 기밀문서를 무단으로 반출했으며, 이를 보안장치가 없는 서랍에 보관한 문제다. 이런 사실들에 대해 있는 그대로 진술하지 않은 것도 죄목으로 추가됐다. 의도나 실제 행위가 없더라도 부주의, 유출 가능성마저 범죄로 처벌한 사례다.
클린턴 불기소와 퍼트레이어스 기소의 차이는 결국 법정에 세우기에 너무 큰 정치인 여부란 점을 빼고 설명하기 힘들다. 법대로가 정치에서 예외가 되는 미국 정치의 모습이다. 처벌되지 않았지만 안보에 구멍을 낸 클린턴의 이메일 게이트는 결국 그가 대선에서 패배하는 결정적 이유로 작용했다.
공교로운 것은 당시 클린턴의 불기소에 대해 트럼프가 형평성, 공정성을 상실한 사법 시스템의 붕괴라고 매섭게 질타한 점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드러난 백악관 기밀유출 사건을 볼 때 트럼프의 처지는 당시 클린턴과 다르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