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구독자 30만 명을 보유한 캠핑 유튜브 채널 ‘밍동’에 돌연 활동 중단 영상이 올라왔다. 30대 여성 밍동이 혼자 씩씩하게 자연을 누비는 콘셉트의 이 채널은, 사실 매순간 남편이 함께 만든 영상으로 채워졌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구독자들의 공분을 샀다. “내일 모레면 50대인 아줌마예요. 여자 혼자서 멋지게 캠핑을 하길래 여동생 걱정하듯 지금껏 봤는데…”
구독자들의 분노는 단순히 해당 유튜버가 결혼 사실을 속인 것에 그치지 않는다. 야외 텐트 취침은커녕, 둘레길 산책과 등산마저 여성에게는 안전을 이유로 만류되는 게 현실. 이런 가운데 커다란 오프로드용 차를 몰아 자연 속으로 들어가 텐트에 의존해 캠핑을 즐기는 밍동의 모습은 수많은 여성에게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줬다. 40대 싱글맘 구독자는 "이 채널에서 힘을 얻어 아들을 혼자 데리고 다니며 캠핑을 시작했지만, 돌이켜보니 별일 없이 돌아온 건 운이 좋아서였다"고 댓글을 달았다. 밍동은 혼자하는 캠핑을 시도하려던 여성들의 용기에 결국 찬물을 끼얹었고, 이로 인해 구독자들이 크게 실망한 것이다.
야생과 자연으로의 탐험은 많은 여성에게 여전히 쉽지 않은 도전이다. 유튜브에 등장하는 용감한 여성들은 롤 모델이라기보다는 대리만족의 대상이다. 한국무역통계진흥원은 국내 캠핑인구를 약 700만 명 수준으로 추산할 정도로, 코로나19 유행 이후 캠핑인구는 급성장했으나 캠핑장과 전국 유명 백패킹 박지에서 눈에 띄는 ‘나홀로 여성 캠핑족’은 소수에 그친다.
이는 아웃도어 활동이 주로 남성 파트너와 동행하는 취미로 여겨지거나, 여성 캠퍼들이 섞이기 힘든 남성 중심적 캠핑 문화가 존재해서다. “세상이 흉흉한데 겁도 없이 여자 혼자 야외에서 자느냐”는 편견도 여성들의 캠핑·백패킹 입문을 어렵게 하는 요인이다.
‘모험하는 여성들의 커뮤니티’를 표방하는 ‘우먼스베이스캠프(WBC)’는 이 같은 문제 의식에서 지난해 만들어졌다. 더 많은 여성과 자연을 누비기 위해 26~28일, 강원 원주시 소재 유알컬처파크에서 열린 WBC 리트릿 캠프 페스티벌에 한국일보 허스펙티브가 동행했다.
"아아악! 이겨라! 뒤집으라고!"
지난 26일 청명한 가을 하늘 아래 울려 퍼지는 괴성. 수십 명의 여성이 무릎에 흙이 묻는 것도 아랑곳 않고 바닥에 놓인 딱지를 열심히 뒤집고 있었다. 양면 딱지를 뒤집어 자기 팀의 색을 최대한 확보하는 게임이었다. 참가자들은 주변의 시선을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겉옷을 훌러덩 벗어 스포츠 브래지어만 입고 잔디밭을 누볐다. 광주에서 온 이경민(30)씨는 "운동장에서 웃통을 벗는 건 생각도 못했는데 여성들끼리 편한 복장으로 몸을 움직이니 안전한 기분이 든다"고 말했다.
파쿠르(안전장치 없이 주위 지형이나 건물을 이용해 자유로운 움직임을 수련하는 활동) 수업이 한창인 한쪽에서는 10명 남짓 여성이 서로의 팔을 꼬아 단단한 지지대를 만들고 있었다. 높은 난간에 선 한 명은, 동료들이 받아주리라 믿고 뒤돌아 낙하한다. 군대 유격 훈련 과정 중 하나인 '트러스트 폴(trust fall)'이다. 또 다른 여성들은 폭 20㎝ 정도의 난간에 올라 동료의 손을 잡고 걷는 중이었다.
파쿠르 강사 석선정(42)씨는 이를 '작은 위험도 크게 받아들이는 인지 왜곡'을 자각하기 위한 활동이라고 설명한다. 새로운 일에 도전하도록 교육받아온 남성의 경우 위험에 직면하는 용기를 내기가 비교적 쉽지만, 사회적으로 용인된 행동의 폭이 좁은 여성이라면 위험에도 지레 겁먹기 쉽다는 의미였다.
"난간에 서면 몸이 바들바들 떨리지만, 막상 걸어보면 위험하지 않다는 걸 알게 되죠. 이런 경험이 쌓이면 위험을 감수하는 역량이 생겨요. 여성들은 서로 시기하고 싸운다는 편견을 알게 모르게 학습하지만, 난간을 걸을 때 옆에 선 동료가 내민 손덕분에 깨닫게 되죠. 여성들도 연대한다는 사실을."
10명이 힘을 합쳐 자신의 키보다 높은 벽을 오르기도 했다. 키 160㎝ 안팎의 참가자들에게는 쉽지 않은 일. 협동이 필수다. 날렵하고 근력이 뛰어난 사람이 먼저 올라 고지를 점하고, 한 사람씩 손을 잡고 끌어 벽을 타고 올라갔다. 전수현(34)씨는 "평소 운동을 잘 하지 않아 실패할 줄 알았는데, 모두 힘을 모아 결국 이뤄내 해방감을 느꼈다"고 말했다.
"처음엔 야외에서 텐트를 치고 자는 게 불편하지 않을까 걱정했어요. 평소라면 안전 걱정부터 했겠지만, 다른 여성들이 있어서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었어요."
정오를 막 넘긴 시간. 작열하는 가을 뙤약볕 아래에서 이재정(28)씨는 처음 만져보는 텐트와 씨름하고 있었다. 텐트의 기둥이 되는 폴대를 조립하는 것까진 쉬웠지만 어떻게 팩을 꽂아 텐트를 고정해야 하는지 애를 먹던 이씨는, 휴대폰으로 유튜브 영상을 골똘히 보더니 이내 척척 텐트의 각을 잡아 완성했다. 다음날 이씨는 전날 경험을 토대로 다른 참가자의 텐트 설치를 도왔다.
2박 3일 일정 동안 모인 150여 명의 여성은 모두 자신의 몸통만 한 배낭에 텐트와 발포매트(편안한 잠자리를 위한 접이식 매트), 침낭 등을 이고진 모습이었다. 2030 여성이 대부분이었지만 4050 중년 여성도 적지 않았다. 60대 엄마와 30대 딸도, 대만과 러시아 국적의 외국인도 '모험하는 여성'이라는 정체성으로 묶여 동고동락했다.
이미영(47)씨는 "늘 캠핑을 하고 싶었으나 어딜 가야 함께 즐길 사람을 만날 수 있을지 몰랐는데 이번 기회에 동료들을 많이 사귀게 됐다"고 말했다. 충남 금산의 대안학교에서 교사로 일하는 박성연(44)씨는 "남성중심 문화가 공고한 지방에서 일하면서 고립감을 느낄 때가 있었는데, 전국 각지에서 모인 다른 여성들과 연결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엿봤다"고 말했다.
50대 여성 차영옥(58)씨는 후배 여성들의 주체적인 활동에 연신 감탄을 표했다. "우리 세대는 부모님이 시집 가라고 하면 그저 수동적으로 따랐죠. 그런데 여기서 만난 젊은 여성들은 내 인생을 어떻게 살지 치열하고 건강하게 고민하더라고요. 어린 친구들의 생각이 늘 궁금했는데,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됐어요."
사회가 규정한 성별 고정관념에 맞서 자신의 영역을 넓힌 인물들의 이야기는 서로 나누는 것만으로 힘이 된다. '마녀체력' 저자이자 15년 차 트라이애슬론 선수로 활약하고 있는 이영미씨가 '모험토크' 세션 연단에 올랐다. 그가 편집자·아내·며느리· 엄마로 살아가던 어느 날, 고도 고혈압 판정을 받고 운동을 하게 된 사연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주어진 수명과 상관없이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나이들 수 있어요." 객석의 눈빛이 반짝였다.
다음날에는 여성 스포츠 교육 플랫폼 '위밋업스포츠'의 신혜미 공동대표, 요트를 사서 태평양 항해를 떠났던 임수민씨가 각자의 두려움과 이를 극복한 과정을 이야기했다.
물론 엄격히 말하자면, 이번 페스티벌을 '모험'이라 일컫기는 힘들다. 주최 측의 관리 아래 위험 요소를 통제한 데다, 실제 야생을 무대로 하지 않았으며, 2박 3일이라는 짧은 기간 이뤄진 캠핑이어서다.
그러나 적어도 이런 시도를 통해 여성들이 삶에서 마주하는 선택지는 하나씩 늘어난다. 텐트를 설치해 보고, 새벽에 갑작스럽게 내린 비를 맞으며 잠을 청하고, 나침반과 지도에 의지해 산을 타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