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르메스가 16년째 한국 작가에 쇼윈도 내준 이유는?

입력
2022.08.30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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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매장 쇼윈도 한국작가 협업으로 꾸며
'아름다움 추구' 정체성 드러내고 예술 지원 의미도
"한국 소비자에 어필하는 로컬라이제이션 전략"

'여름의 물보라, 봄맞이 대청소, 최고의 케이크 레시피를 찾아서, 보물 사냥꾼, 농사짓는 전원생활, 머나먼 여정...'

미술 작품이나 소설의 제목이 아니다. 패션 브랜드 '에르메스' 국내 매장 쇼윈도에 붙은 명칭들이다. 매장 쇼윈도마다 각기 다른 이름이 달린 건 16년 전 에르메스가 윈도 디스플레이를 한국 작가들에게 맡기면서다. 다가가기 어려운 고가 브랜드라는 이미지와 달리, 매 시즌 개성 넘치는 윈도 디자인이 브랜드 신상만큼이나 화제를 모은다는 게 업계 후문이다.

에르메스코리아에 따르면, 에르메스는 럭셔리 브랜드 가운데 유일하게 쇼윈도 디자인을 해당 국가 출신 작가와의 협업으로 진행하고 있다. 매년 특정 테마가 주어지면 그 안에서 작가들이 각자 자신만의 스타일로 디자인을 하는 방식이다.

콧대 높은 명품 브랜드가 십 수년 동안 쇼윈도를 현지 작가들의 캔버스로 내어주고 있는 이유는 뭘까. 에르메스 관계자는 "에르메스가 장인 정신을 바탕으로 수작업으로 제품을 만드는 것처럼 매장 윈도에도 지역만의 예술성을 반영하기 위한 취지"라며 "천편일률적인 똑같은 디자인을 지양하고 윈도마다 작가들의 열린 해석과 창의성을 고루 반영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오랜된 협업의 역사만큼 프로젝트에 참여한 작가들 리스트도 상당하다. 2006년 플라잉시티를 시작으로 배영환, 지니서, 권오상, 김동희, 정연두, 잭슨홍, 길종상가, 박천욱 등 국내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설치 미술 작가들이 다수 참여했다. 지금은 잭슨홍, 길종상가, 박천욱 작가가 에르메스 10개 매장 쇼윈도를 디자인하고 있다.

큰 테마가 정해져 있지만 이야기를 만들고 풀어내는 것은 온전히 작가의 몫이다. 에르메스코리아에 따르면, 올해 브랜드의 주제는 '가벼움의 미학 (Lighthearted)'이다. 2014년부터 도산 파크 매장 윈도를 담당해 온 잭슨홍 작가는 이번 여름 쇼윈도에 상상 속 워터파크를 구현해 행인들의 걸음을 멈추게 했다. '여름의 물보라(Summer Splash)'라는 제목의 윈도는 해변에서 한 여성이 느긋하게 물놀이를 즐기는 장면을 담고 있다. 수영장 바닥에 일렁이는 물결의 묘사는 핸드 스프레이와 페인팅으로 작업했다고 한다. 상품을 쇼윈도에 직접 전시하는 대신 가방 모양의 풀장, 팔찌 형태의 튜브로 표현해 위트를 더했다.

이처럼 글로벌 패션 브랜드가 작가들과의 협업으로 대중과의 접점을 넓히려는 시도는 최근 들어 더욱 활발해지는 추세다. 구찌, 보테가 베네타 등 명품 브랜드를 소유한 케어링그룹은 2014년부터 여성 아티스트 관련 전시를 꾸준히 열었고, 스페인 패션 브랜드 로에베는 2016년부터 공예작가를 후원하기 위한 공예상을 운영 중이다. 가장 최근에는 제주 출신 정다혜 작가가 로에베 공예상 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박소현 경희대 의류디자인학과 겸임교수는 "패션 브랜드가 한국 예술가들에게 다양한 예술 협업 기회를 제공하는 건 한국 감성에 어필하려는 로컬라이제이션(localization·지역화)의 일종"이라며 "지역 작가 경력에는 브랜드의 유명세가 따라붙고, 명품 브랜드의 예술적 요소를 현지화해 대중에게 친근하게 드러내고 확장시킬 수 있어 서로 윈윈인 전략"이라고 설명했다.


손효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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