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징에는 난징루(南京路)가 없다. 서울에 ‘서울로’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부산이나 광주에 ‘서울로’가 있어도 이상할 듯하다. 중국은 도시 이름을 도로명으로 짓는 경우가 많다. 난징루가 단연 인기가 많다. 상하이를 비롯해 텐진, 칭다오, 광저우, 허페이, 쉬저우, 쭌이, 웨이하이, 진창, 린이, 푸닝, 마카오에 있다. 타이완에도 많고 일본 고베에도 있다. 상하이의 난징루는 1865년 영국 조계 당국이 지었다. 영국은 아편을 팔고 전쟁을 일으켜 청나라를 굴복시킨 후 난징조약을 체결했다. 그 기념이었다.
지하철 인민광장역에서 내린다. 차 없는 거리로 연결된다. 늘 사람이 북적거린다. 1850년대 난징루 일대에 경마장이 있었다. 상인들이 돈벌이를 위해 눈을 부라렸다. 상하이 사람들은 ‘도박 소굴’이라 불렀다. 세월이 지나 조계지에 인구가 늘자 장사꾼이 운집해 백화점을 짓고 상품을 팔았다. 최고의 번화가가 됐다. 다른 도시의 난징루도 대체로 번화한 거리다. 대명사가 됐다.
1.5㎞에 이르는 거리에는 여전히 그 시대의 자취가 남아 있다. 1908년 전차가 개통했고 1917년에 첫 대형 건물인 선시대루(先施大樓)가 세워졌다. 이듬해 영안백화(永安百貨)가 뒤를 이었다. 신신(新新)·대신(大新)과 함께 화교자본이 앞다퉈 진출했다. 바로크양식의 7층 건물인 영안백화가 여전히 영업 중이다. 당시로선 정말 웅장한 건물이었다. 글로벌 음료수 광고판이 옆자리를 차지하고 있고, 패스트푸드 브랜드가 촘촘하게 들어섰다. 과거와 현재, 미래가 뒤섞인 듯한 착각이 드는 거리다. 복잡하다 느끼는 이유가 인파 때문만은 아니다.
동쪽 끝으로 가면 와이탄(外灘)이다. 건국 후 초대 시장인 천이의 동상이 있다. 찻길 건너에 77m 높이로 와이탄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 보인다. 영국계 유태인인 빅터 사쑨이 1929년에 건축했다. 사쑨 일가는 1832년 인도 봄베이에서 창업해 아편 장사로 떼돈을 벌었다. 부동산 사업에 진출했으며 상하이 최고의 갑부였다. 저층은 네덜란드 은행 등이 입주했고 옥상에는 19m에 이르는 녹색 금자탑을 설치했다. 사쑨이 거주한 호화 주택이었다. 동남부 해안가 스푸어항(石浦漁港)에 있는 아편 전시실로 기억이 날아간다. 중독자의 피로 세운 와이탄 랜드마크와 비교하지 않을 수 없다.
상하이 사람은 상류를 리(里), 하류를 와이(外)라 한다. 와이탄은 황포강 하류의 서쪽 강변이다. 쿤산(昆山) 전산호(淀山湖)에서 발원해 상하이를 가로질러 장강과 합류해 바다로 빠져나간다. 언제나 붐빈다. 방송탑인 동방명주(東方明珠)를 보려는 사람들 때문이다. 468m로 높기도 하지만 멋진 디자인으로 상하이의 상징물이 됐다. 1994년 10월 처음 등장했을 때 아시아에서 가장 높았다. 물론 지금은 아니다.
와이탄에서 천천히 걸어 예원(豫園)으로 간다. 명나라 가정제 시대 쓰촨 포정사를 역임한 반윤단이 건축한 원림이다. 정원과 저택이 조화를 이룬 예원을 짓는데 20년이 걸렸다. ‘예(豫)’는 평화롭고 편안하다는 뜻이다. 고향에서 여생을 보내는 관리에게 딱 어울리는 이름이다.
연못을 꾸미고 인공으로 산을 쌓았다. 대가산(大假山)이 아담하고 포근한 분위기다. 눈으로는 심신을 안정시키고 발로는 운동 부족을 메웠다. 주인이 사망 후 가세를 잇지 못했다. 예원은 끊임없이 주인이 바뀐다. 보수와 중건이 이어져 지금의 2만㎡ 규모가 됐다. 450여 년의 역사문화를 담았으며 조형미 뛰어난 관광지가 됐다. 2019년 11월 프랑스의 마크롱 대통령 부부가 상하이에 왔을 때 회견 장소였다. 시진핑 주석 부부는 예원의 일일 가이드였다.
남문으로 들어가면 바로 삼수당(三穗堂)이 나온다. 1760년 청나라 건륭제 시대에 리모델링했는데 문인과 유지가 모여 회합하던 장소다. 관청의 축하연이 열리고 황제의 칙서를 강의하기도 했다.
후한서에 나오는 고사인 ‘양상삼수(梁上三穗)’가 출처다. 광한의 태수 채무가 대전 들보에 붙은 벼 이삭 3개를 얻었다는 꿈에서 유래한다. 관직과 녹봉이 오른다는 해몽을 들었는데 정말 한 달 후 승진했다. 먼발치의 상하이 관리가 모이는 장소에 어울리는 작명이다. 편액 글자는 반윤단의 서체에서 뽑았다.
성시산림(城市山林)도 걸렸다. 비록 심사가 복잡하나 우아한 경지를 추구하는 마음이다. 시경에 나오는 영대경시(靈臺經始)가 가운데에 자리 잡았다. ‘영대를 경시할 때’라는 문구가 나오는데 영대를 건축하기 시작할 때다. 백성들이 자식처럼 달려와 빠르게 완성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국태민안의 뜻이다.
복도 입구에 철로 제작된 사자가 지키고 있다. 암수 한 쌍이다. 원나라 시대 제작됐으니 예원보다 200년이나 나이가 많다. 1,000㎞나 떨어진 허난의 안양(安陽) 관아를 지키고 있었다. 일제는 대륙의 유물을 많이 강탈했다. 상하이를 거쳐 도쿄로 갈 운명이었다. 용광로에 녹아 총포로 전락할 신세였다.
사자 받침대에 새겨진 원나라 시대 연호가 발견돼 재난을 모면했다. 안양의 장인 이름과 연호 및 날짜도 적혀 있었다. 고귀한 사자를 예원이 품었다. 예원의 문마다 사자가 유난히 많다. 수문장으로는 최고의 기량이다. 산휘천미(山輝川媚) 문에 청나라 시대 석사자 한 쌍이 있다. 암수 사자는 보통 정면을 응시하는데 이 둘은 서로 얼굴을 마주 보고 있다. 표정도 해학이 넘쳐 친근하다.
대가산 옆에 2층 전각이 있다. 1층을 앙산당(仰山堂)이라 부른다. 안에서 보면 바깥 연못과 가산이 보인다. ‘여기에 높은 산과 험한 고개가 있다’는 차지유숭산준령(此地有崇山峻嶺) 편액이 걸려 있다. 살짝 웃음이 나온다. 청나라 도광제 시대 양강총독을 역임한 도주가 쓴 시의 일부분이다. ‘멀리 유람하며 마음에 품는다’는 유목빙회(遊目騁懷)에 이어지는 대목이다. 진짜 산과 고개가 아니지만 분위기만큼은 다르지 않다. 2층은 따로 권우루(卷雨樓)라 부른다. 이름만 들어도 우수에 젖는다.
출처는 당나라 초기 왕발의 칠언율시 ‘등왕각(滕王閣)’이다. ‘날이 저무니 주렴을 걷고 서산에 내리는 비를 바라본다’는 주렴모권서산우(珠簾暮卷西山雨)에서 뽑았다. 우한의 황학루, 위에양의 악양루, 옌타이의 봉래각과 함께 중국 4대 명루인 등왕각은 난창에 위치한다. 등왕각에서 바라본 왕발의 조각상이 생각난다. 연못 안에서 57.5m 높이의 누각을 응시하며 시를 짓는 듯한 동작이다. 권우루의 발을 올리면 비가 내릴지도 모른다. 시를 읊으면 훨씬 공감이 되지 않을까?
담장에 엄청 큰 용머리가 불쑥 나타난다. 예원의 멋스러운 감각은 담장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빨과 비늘, 발톱까지 세밀하고 웅장하다. 용이 요동치는 모습은 기와에 고스란히 전해진다. 하얀 담장을 따라 조성돼 천운용장(穿雲龍牆)이라 부른다.
구름을 타고 승천하는 용장이 여러 군데 있다. 부친을 위무하려고 지었다고 전해진다. 아무리 담장 위라 해도 황제를 상징하는 용을 세우는 일은 용기가 필요했다. 적절한 면피용 수단이 있었으니 발톱을 4개만 만들었다. 용머리 앞을 눈여겨보면 그냥 지나치기 힘든 동물이 하나 꼭꼭 숨었다. 재물을 주는 두꺼비다. 용과 더불어 두꺼비를 만들어 여생을 그저 행복하게 살자 외치는 듯하다.
5칸 크기의 점춘당(點春堂)이 보인다. 1821년 청나라 도광제 시대 푸젠 상인이 건축했다. 상하이에 머물 때 별장으로 이용했다. 1853년 상하이에 민란이 발생했다. 소도회라 불리는 비밀결사체로 민간신앙과 반청 사상이 혼합돼 있다. 태평천국 민란과 호응해 일파만파 번졌다. 당시 지휘부가 머물던 장소다.
주동자인 류여천 등은 푸젠성 샤먼의 소도회와 연합해 상하이 관아를 점령하고 관리를 사살했다. 초기 1,000여 명이었으나 금세 수만 명으로 늘었다. 대명국(大明國)을 세우고 항거했으나 1년 6개월 만에 실패로 끝났다. 청나라 말기 서예가인 심윤묵의 대련이 걸려 있다. 담량포공확(膽量包空廓)과 심원유수정(心源留粹精)이다. ‘배짱에는 널찍하게 담고 마음에는 순수를 남겨라’라는 말이다.
2층 누각인 회경루(會景樓)로 간다. 연못이 삼면을 둘러싸고 있다. 주위는 나무와 풀이 우거져 화사하고 푸르다. 적옥수랑(積玉水廊) 복도를 따라 걸어가면 유상정(流觞亭)이 나온다. 왕희지가 ‘난정서(蘭亭序)’에 기록한 풍류다. 물길 따라 흐르는 술잔을 즐기며 문인은 시를 짓고 있을 듯하다. 정자 옆에 세 번 굽는 다리인 삼곡판교(三曲板橋)를 건넌다. 물 위에 뜬 기분으로 걷는다. 유유자적 발걸음을 옮기면서 물고기와 연꽃을 감상하기 좋은 위치에 멈춘다.
철사자, 용장과 함께 3대 보물이 옥영롱(玉玲瓏)이다. 기기묘묘한 생김새로 가산을 쌓을 때 사용하는 돌이다. 보통 태호석이라 한다. 반윤단이 아침저녁으로 가까이에서 살펴보며 즐거워했다. 얼마나 아꼈는지 바위 위쪽에 옥화(玉華)라는 글자를 새겼다.
맞은편에 서재가 있는데 옥화당이다. 옥처럼 영롱한 감상을 담아 이름을 지었을 터인데 아무리 봐도 감정이입이 되지 않는다. 쑤저우 류원과 항저우 서호에 있는 바위와 함께 강남 3대 기석으로 불린다. 높이 3m, 너비 1.5m, 두께 80cm로 무게가 3톤이다. 바닥에 향로를 두면 연기가 솟아오르고 꼭대기에 물을 부으면 샘처럼 흐른다고 한다. 돌이 보물이 되려면 과장이 조금 필요하다.
동남쪽 구석에 내원(內園)이 있다. 대문에 석사자 한 쌍이 눈매를 부라리고 있다. 지붕 위에 머리는 용, 몸은 물고기인 오어(鰲魚)가 화재를 감시하고 있다. 그 아래 오른쪽에는 문관, 왼쪽에 무관이 조각돼 있다. 기와도 아기자기한 문양을 살포시 새겼다. 꼼꼼하고 유려하게 역사 이야기를 조각해 위엄이 돋보인다. 신선이 여기저기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며 장수와 다복을 염원하는 곽자의상수도(郭子儀上壽圖)도 보인다. 청나라 강희제 시대인 1709년에 건축했다.
안쪽에 19세기 말에 건축한 고희대(古戲臺)가 있다. 공연을 펼치던 공간이다. 정면에 목조로 만들고 금박을 한 사자, 봉황, 용이 반짝거린다. 무대 안에는 문짝 6개에 산과 강, 인물, 화초 도안이 있다.
무대 앞에서 고개를 드니 천장으로 조정(藻井)이 보인다. 단순해 보였는데 볼수록 최고의 디자인 감각이 엿보인다. 22개의 원과 20개의 호가 서로 엇갈리며 어울려 회오리바람이 일어나는 듯하다. 가운데에 동그란 거울이 있는데 광채가 나는 듯하다. 28마리의 금빛 새가 날개를 펴고 당장이라도 날아갈 듯 사방에 붙어 있다. 누구의 고안으로 빚었는지 정말 박수를 보내고 싶다.
내원을 나오니 멀리 청도각(聽濤閣)이 보인다. 연못 옆 누각인데 그냥 지나쳤다. 황포강과 가장 가까운 위치라 파도소리가 들린다는 작명이다. 단층은 정자이고 복층은 누각이다. 청도각은 2층 구조이며 두 개의 누각이 붙어있는 구조다. 용마루가 있는 누각에는 오어가 하늘로 향해 꼬리를 쳐들고 있다. 바로 붙은 누각 꼭대기에는 선학이 우아한 자세로 서 있다. 고고한 자태를 상하이 초고층 빌딩이 가로막고 있다.
다시 황포강으로 간다. 예원 지붕 너머로 보인 건물은 상하이중심빌딩(上海中心大廈)이다. 와이탄에서 보니 전모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정말 높아 주변 빌딩을 짓누르는 듯하다. 632m에 이르고 127층이다. 중국에서 가장 고층이다. 빌딩을 정면에서 바라보는 지점에 부두가 있다. 오후 햇살이 점점 사라지기 시작한다. 동방명주가 보이는 곳까지 천천히 산보를 하고 돌아온다. 어둠이 강물을 적시면 유람선이 출발한다. 황포강 서쪽과 동쪽의 야경을 모두 감상할 수 있다.
한 바퀴 도는데 대략 1시간 조금 더 걸린다. 유람선은 출발과 함께 먼저 하류로 이동한다. 조명이 여러 색깔로 순식간에 바뀌고 빌딩 이름과 광고가 현란하다. 크고 작은 유람선이 스쳐 지난다. 동방명주는 밤에도 날렵한 맵시를 드러낸다. 너무 자주 여러 색깔로 바뀌니 눈이 아플 지경이다.
동쪽은 글로벌 경제 도시답게 돈 자랑을 지겹도록 보여준다. 동방명주를 지나친 다음 되돌아오기 위해 크게 회전한다. 상하이의 과거가 숨은 서쪽도 아낌없이 치장하고 있다. 고풍스러운 건물이 많아 스카이라인이 차분한 편이다. 상하이의 과거와 미래가 한꺼번에 떠오르는 유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