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평택시에 사는 김모(47)씨는 얼마 전 중고거래 사이트에서 평소 눈에 담아뒀던 스피커가 싸게 올라온 걸 발견했다. 김씨는 거래 전 금융사기 방지 서비스인 ‘더치트’를 통해 판매자 조모씨의 계좌를 검색했다. 사기 전력은 나오지 않았고, 안심하고 48만5,000원을 보냈다. 그러나 입금 직후 판매자는 종적을 감췄다. 김씨는 곧바로 경기 평택경찰서에 신고했지만 범인의 행방은 오리무중이다.
중고거래 시장이 점점 커지면서 사기 피해도 눈덩이처럼 커지고 있다. 특히 사기범들이 비슷한 수법을 계속 쓰는데도 현행법상 이를 막을 방법이 없어 피해자를 양산하고 있다는 지적이 많다.
23일 더치트 등에 따르면, 김씨처럼 조씨에게 사기를 당한 횟수는 최근 3주간 97건이나 된다. 피해 금액도 5,000만 원에 이른다. 온라인 중고 거래자들은 입금 전 더치트에서 계좌번호를 조회해 사기 신고 내역을 확인했지만, 조씨 앞에서는 소용없었다. 정해진 날짜 없이 예금주가 원할 때 적금을 넣을 수 있도록 개설되는 자유적립식 적금계좌(자유적금계좌)의 허점을 조씨가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자유적금계좌는 비대면으로 자유롭게 개설 및 폐쇄가 가능하고 개수 제한도 없다. 일반 입출금 계좌는 한 번 만든 뒤 한 달은 지나야 추가 개설할 수 있고, 이 기간에 개설을 원하면 관련 서류를 금융기관에 따로 제출해야 한다. 대포통장으로 악용되는 걸 방지하기 위한 조치다. 반면 자유적금계좌는 이런 유예 기간이 없다. 이달 들어 조씨가 개설한 계좌만 27개. 판매 사기를 칠 때마다 새 계좌를 만드니 더치트 사기 이력 조회에 걸리지 않았던 것이다.
자유적금계좌를 악용한 중고 사기가 판을 치자 경찰 신고도 잇따르고 있다. 황당한 건 경찰 신고 접수 후에도 다른 사람이 같은 사기범에게 당하는 2차 피해가 속출하고 있다는 점이다.
중고거래 등 물품 사기는 통신사기피해환급법상 전기통신금융사기에 해당하지 않아 문제가 된 계좌를 즉시 지급정지할 수 없는 탓이다. 경찰이 법원으로부터 금융계좌 압수수색 영장을 받아 은행에 지급정지를 신청하고 집행되기까지는 최소 1, 2주가 걸리는데, 이사이 발생하는 추가 피해를 막을 뾰족한 대책은 사실상 없다. 조씨의 사기 피해 신고는 이달 2일 처음 접수됐지만, 그는 유유히 사기 행각을 이어갔다. 현재 파악된 조씨 관련 경찰 신고 건수만 23건이다. “중고 시장은 ‘블루오션’”이라는 사기범들의 비아냥이 허언은 아닌 셈이다.
피해 규모도 폭증하고 있다. 유동수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에 따르면, 2014년 4만5,877건이었던 피해 건수는 2020년 12만3,168건으로 3배 가까이 늘었다. 같은 기간 피해금액 역시 897억5,400만 원으로 6년 전(202억1,500만 원)의 4.5배다.
최근 윤희근 신임 경찰청장은 보이스피싱과 같은 전기통신금융사기 등 7개 악성 범죄를 ‘경제적 살인’으로 규정하고 발본색원을 천명했지만, 중고 사기는 여기서도 빠져 있다. 서준배 경찰대 행정학과 교수는 “중고 사기도 서민을 울리는 민생 범죄이기는 마찬가지”라며 “전기통신금융사기 범주에 포함시켜 초기에 피해를 방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