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갈등의 뇌관인 징용 '현금화'가 최후의 순간을 맞이하고 있다. 8월 19일 대법원은 미쓰비시가 특허권 특별현금화 명령에 불복하여 제기한 재항고 사건에서 '심리불속행' 여부를 판단하지 않았다. 물론 이것이 현금화라는 시한폭탄의 제거를 의미하는 건 아니다. 말하자면 정부에 피해자 그룹과의 대화, 일본과의 외교 노력으로 해결을 꾀할 시간 여유를 준 것이다. 일본 정부는 현금화가 될 경우, 레드라인을 넘는 것으로 경고하며 보복을 다짐해 왔다. 확정판결 후 4년이 경과했지만, 일본 정부와 기업의 단호한 배상 거부와 판결 이행을 요구하는 피해자 그룹과의 법 절차를 둘러싼 지리한 공방은 여전히 지속 중이다.
문재인 정부는 초기에는 '죽창가'를 외치며 일본 측을 압박했지만, 나중엔 징용 재판에 따른 강제집행이 '곤혹스럽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일본과의 관계 회복을 위한 적극 행보에 나서며 과거사 문제는 보편 가치와 규범에 입각하여 미래지향적으로 해결해 나가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징용 문제에 대해서는 "대법원 판결을 집행해 나가는 과정에서 일본이 우려하는 주권문제의 충돌 없이 채권자들이 보상받을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하고 있는 중"이라며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이는 징용 피해자에 대한 대위변제 등을 통해 대법원 판결 취지를 이행하되 일본과의 마찰을 최소화할 해결책을 마련하겠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외교부는 피해자 그룹과 전문가들이 참여하는 민간협의회를 구성하여 해결안 도출을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그러나 피해자 그룹이 요구하는 일본 기업의 참여와 사과는 일본 정부의 태도와 여론을 고려할 때 매우 어렵다. 일본이 요구하는 한국 정부의 결단에 의한 징용 문제의 국내 처리도 3권분립과 국민 정서를 감안할 때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 현실이다.
징용 문제를 원점에서 생각해 보면 부지불식간에 우리는 일본발 '현금화 매직'에 걸려 있는지도 모른다. 현금화가 되면 한일관계가 파탄난다는 것은 '신화'이자 '프로파간다'이지 외교 현실은 아니다. 대법원 판결이 난 이상, 일 기업의 배상을 막을 길은 없다. 더욱이 피해자 동의를 얻지 못하는 한, 강제집행의 유보에도 한도가 있다. 애초부터 행정부가 법원의 판결 결과를 뒤집는 개입이란 법치주의 한국에선 불가하다.
따라서 우리는 '현금화 매직'을 과감히 탈피하고 현금화에 대비한 치밀한 대일외교 위기관리 프로그램을 가동할 필요가 있다. 일본 정부에는 대법원 판결이 나온 이상 이를 뒤집는 것은 불가하다는 점을 납득시키고 일본 기업에 발생한 '손실'은 기금조성 등을 통해 '변제'할 것을 약속하면 좋을 것이다. 차제에 정부는 현금화가 결코 청구권 협정의 형해화가 아니며 향후에도 대일 식민지 배상을 청구할 뜻이 없음을 천명하면 좋겠다. 징용 피해자 문제는 국민을 지켜주지 못한 데서 비롯된 문제이므로 정부가 국가보훈 차원에서 풀어가야 할 과제이며 궁극적으로는 특별법을 정비하여 다뤄나가야 한다.
일본 역시 현금화=청구권협정 위반=보복이라는 '매직'에서 벗어나 징용재판 결과를 겸허히 수용하고 한국 정부의 미래지향적 과거사 정책에 화답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일본이 만약 보복에 나선다면 관계 악화의 악순환은 필연적이며 관계 회복에 열심인 윤 정부의 선의에 찬물을 끼얹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따지고 보면 문제의 원점은 현금화가 아니라 대법원 판결이다. 일본 기업 입장에서 보면 해외투자의 사법 리스크 발생인 셈이다. 대법원 판결에도 불구하고 한국 정부가 그것을 뒤집을 수 있거나 뒤집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한국의 법치주의, 민주주의에 대한 몰이해와 다름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