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저 가상인간이에요" 그녀의 깜짝 고백에도 Z세대는 더 열광했다

입력
2022.09.08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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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지 TV CF 나오고 가상인간 인플루언서 주목
25년 전 '아담'과 달리 진짜 인간 같은 기술력
'부캐' 메타버스 익숙한 Z세대 친숙하게 수용
사생활 문제 없어 기업들도 마케팅에 적극 활용


2020년 12월 30일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인스타그램에 깜짝 놀랄 만한 고백이 있었다. 로지라는 인플루언서가 "사실 나는 가상인간이었다"고 밝힌 것이다. 로지는 이집트, 보츠와나, 짐바브웨 등 해외 여행 사진을 올리거나 성수동, 한남동 카페에 간 일상을 공유하면서 넉 달 만에 1만 명 팔로우를 모은 '핫'한 인플루언서였다. 개성 있는 얼굴에 남다른 패션 감각으로 그가 사진을 올릴 때마다 댓글에는 "모델인가요?" "너무 힙하다" "옷은 어디서 샀나요?" 등의 반응이 주를 이뤄 왔다.

로지가 가상인간이었다는 사실이 알려지고 나서 예상 밖의 상황이 펼쳐졌다. 오히려 이용자들은 로지에 더 열광했다. "되레 더 신선하고 충격적이면서 좋다" "묘한 분위기가 너무 예뻐서 팔로우했는데, 가상인간이라니 대박이다" 등의 댓글 반응이 쏟아졌다.

이후 로지는 광고 시장까지 진출했다. 금융, 자동차, 패션, 유통 등 다양한 업종에서 홍보 모델을 하고 있다. 현재 로지는 팔로워 수가 14만 명을 넘어서면서 연예인급으로 성장했다. 로지의 인스타그램 광고 비용만 1,000만 원이 넘고, TV CF 모델료는 1년에 2억 원을 훌쩍 넘어섰다고 한다. 로지의 성공 이후 지난해부터 국내에서만 활동 중인 가상인간만 150명이 넘을 정도다. 조만간 TV를 켜면 누가 가상인간인지, 누가 진짜 사람인지 알기 어려울 것이란 말도 나온다.


진짜 사람인지, 가상인간인지 구별 어려워



사실 우리에게 가상인간의 개념은 그렇게 새롭진 않다. 1998년 등장한 사이버 가수 '아담'도 가상인간이었다. '세상엔 없는 사랑'이라는 제목의 노래로 데뷔한 아담의 음반은 당시 20만 장이나 팔리고, 9시 뉴스에도 나올 정도로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인기는 금방 식었다. 당시의 컴퓨터 그래픽(CG) 수준이 높지 않아 가상인간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할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사람 얼굴 모양을 본따 만들었지만 당시 아담을 실존 인물이라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25년 전 반짝했던 가상인간이 이제서야 각광 받는 이유는 뭘까. 우선 인공지능(AI) 기술이 CG와 결합하면서 가상인간의 모습이 사람과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의 수준까지 올라간 점이 크다. 게다가 Z세대의 경우 메타버스라는 가상공간 개념에 익숙하고, '부캐(부캐릭터)'로 불리는 멀티페르소나(다중자아)에 열광하면서 가상인간의 개념도 손쉽게 받아들였다.

이미 해외에선 일찍부터 가상인간의 성장성에 주목해 왔다.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가상인간은 2016년 제작된 미국의 팝 가수 '릴 미켈라(Lil Miquela)'다. 미국 LA에 사는 브라질계 19세 가수로 설정된 그는 샤넬, 프라다, 발렌시아가, 디올, 지방시 같은 명품 브랜드 모델로 기용됐다. 그의 인스타그램은 팔로우만 300만 명이 넘으며, 2019년에만 1,170만 달러의 수익을 거둔 것으로 전해진다.

가상모델 '슈두(Shudu)'는 미국 팝가수 리한나가 만든 화장품 브랜드 '펜티 뷰티'의 립스틱을 바른 모습과 함께 가상인간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며 큰 관심을 모았다. 슈두는 삼성전자의 갤럭시Z플립의 모델로 국내에도 소개된 바 있다. 일본 최초의 가상인플루언서 '이마(Imma)' 역시 포르셰, 셀린느, 디올 등의 기업모델로 활동 중이다.

국내에서 가상인간이 주목받은 계기는 콘텐츠 제작 기업 싸이더스 스튜디오 엑스가 만든 로지가 지난해 7월 신한라이프의 TV 광고에 등장하면서다. 해당 광고에서 로지가 춤을 추는데, 가상인간인지 아닌지를 구분하기 어렵다는 반응이 쏟아졌다. 해당 영상은 광고임에도 불구하고 조회 수가 1,000만 건을 넘길 정도로 주목받았다.

인공지능(AI) 그래픽 전문 기업 펄스나인이 제작한 가상인간 아이돌 '이터니티'의 멤버 제인은 지난달 YTN 생방송 뉴스에 출연해 화제를 모았다. 그동안 녹화된 영상이나, 인스타그램에서만 활약했던 가상인간이 생방송 환경에서 구현됐기 때문이다. 제인은 뉴스 앵커의 질문에 대답을 하고 춤까지 가르쳤다. 방송 이후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이게 가상인간이라니 무섭기까지 하다"는 반응도 나왔다.



"스타 모델보다 싸고, 과거 논란 발생할 일 없어"



기업들은 가상인간을 마케팅, 엔터 영역에서 적극 활용하고 있다. 광고 모델로 연예인을 기용하는 것보다 비용이 훨씬 적으면서도 사생활 논란 등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 자체가 없다는 점을 주목한다. 최근 인천 SSG 랜더스와 KT 위즈(wiz)의 경기에서 시구에 나선 가상인간 '와이티'도 신세계그룹에서 기획하고, 펄스나인이 제작한 가상인간이다.

허서희 신세계그룹 크리에이티브랩 부장은 한국일보와 인터뷰에서 "우리가 기획한 가상인간임을 밝히기도 전부터 와이티에 대해 광고 의뢰가 서너 건 들어왔다"면서 "인간 모델을 썼을 때 문제가 생길 수 있는 과거사, 인성 등 논란이 없고, 회사가 원하는 이미지를 만들어 내기도 좋다"고 말했다.

와이티는 기획부터 공개까지 7개월 정도가 걸렸고 기획 인원도 4명뿐이었다. 적은 인원이 투입된 것에 비하면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인스타그램에서는 첫 게시 글을 올리고 3개월 만에 2만 명의 팔로워가 모였고, 최근에는 서울시 홍보대사에 위촉됐다. 허 부장은 "광고비도 웬만한 아이돌을 쓰는 것에 100배, 1,000배 정도로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싸다"고 설명했다.



가상인간 익숙한 Z세대 "연예인도 미디어로만 접하는데"




가상인간에 대한 대중들의 반응은 갈린다. 태어날 때부터 디지털 환경에 노출된 Z세대(1990년 중반 이후 출생)는 가상공간과 현실을 명확하게 구분하지 않는 만큼 가상인간의 존재를 낯설어하지 않는다. 실제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연예인도 미디어를 통해서만 만날 수 있는데 연예인 좋아하는 거나 가상인간 좋아하는 거나 별로 다르지 않다"며 "가상인간이 하는 사회 활동도 불편하지 않다"는 글이 올라왔다.

하지만 일부에서는 '굳이 인간을 두고 왜 가상인간을 쓰나'라는 불편한 반응도 있다. 지난달 방탄소년단과 손흥민의 뒤를 이어 가상인간 '여리지'가 한국관광공사의 명예 홍보대사가 됐다는 사실을 두고 SNS에는 "실체도 없는 가상인간이 사람의 자리를 뺏었다"는 의견이 올라왔다.

이병훈 중앙대 사회학 교수는 "디지털 기술 혁명이 하나의 새로운 문명을 열어 가는 건 분명하다"면서 "다만 디지털 생활이 자신의 일상인 젊은 층과 가상의 존재를 실감하지 못하는 기성세대 간 인식 차이가 있을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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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사실 저 가상인간이에요" 그녀의 깜짝 고백에도 Z세대는 더 열광했다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2082310450004138

②얼굴 100만개·표정 1500장이 만든 가상인간..."Z세대 마음 얻어야 살아 남아"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2082520280002989

③가상 인간이 일자리 빼앗는다? 즐거운 만큼 갈등도 커진다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2082516050005407

안하늘 기자
소진영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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