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방에 놓일 북스탠드, 영화관의 매표소와 수납장, 화장품 가게에서 쓸 스툴, 시립미술관의 어린이 놀이공간, 백화점 명품 매장의 쇼윈도 디자인...'
최근 1년 동안 디자이너 박길종(40)씨가 직접 디자인한 물건 혹은 공간들의 리스트다. 개인 고객을 위한 맞춤 가구부터 미술관이나 명품 브랜드 매장의 윈도까지 망라하는 전방위 디자인 작업이다. 그의 이름 뒤에 '사장', '작가', '목수', '실장' 등 매 프로젝트마다 다른 직함이 따라붙는 이유다.
박씨는 자신이 만든 디자인 스튜디오 '길종상가'에서 올해로 11년째 세상에 하나 뿐인 물건과 공간을 만들고 있다. 최근 '길종상가 2021' '사포도' 두 권의 책을 내고 그간의 작업을 소개한 그는 "실용과 예술의 중간 어딘가에 있는 듯 하다"고 했다. 10년사이 맞춤 디자인 업계에서 대체불가능한 디자이너로 자리잡은 그를, 혹자는 '1세대 엑스스몰(X-small) 디자이너'라고 칭한다.
서양화를 전공한 박씨가 한 명을 위한 맞춤 디자인을 하게 된 건 목공일을 시작하면서다. 대학을 졸업 한 뒤 1년 동안 목공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어깨너머로 가구 제작을 배웠고 지인들의 부탁을 받아 '본의 아니게' 가구를 만들기 시작한 것. 그는 "가구 제작을 위해 고객과 소통하면서 꼭 물건이 아니더라도 용역서비스나 문화 콘텐츠 등을 책임져 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며 "마치 1인 인력사무소처럼 인테리어 보수나, 가전제품 수리, 이삿짐 배당 등 개인 고객들의 생활에 필요한 일들을 대신해주거나 원하는 물건이나 공간을 뭐든 유용하고 재미있게 만들어주는 일을 닥치는 대로 했다"고 회상했다.
자신의 이름을 따 말장난처럼 만든 '길종상가' 홈페이지는 전진 기지 역할을 했다. 길종상가 안에 '가공소', '간다 인력사무소', '사진관' 등 가상 가게를 만들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들, 즉 '박길종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는 방법을 기록했다. "요즘 말로 '부캐(부수 캐릭터)' 활동을 꾸준히 재밌게 해온 건데 사례가 숱하게 쌓이면서 길종상가의 정체성이 만들어졌어요."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재미'를 진지하게 대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빠르게 이름을 알렸다. 그는 "고집스럽게 한 클라이언트를 위한 디자인 작업을 전개하다보니 그 자체로 독창성과 희소성이 생긴 것"이라며 "유행보다 개성을 중시하는 트렌드가 점점 강해지던 때에 마침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붐과 맞물리면서 운좋게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었다"고 말했다.
일반적인 디자인 체계를 벗어난 덕분인지 작업 규모와 활동 반경은 나날이 확장됐다. 박씨는 "초창기 길종상가의 일감은 주로 개인을 위한 가구 디자인과 제작이었지만 점차 브랜드 홍보를 위한 디스플레이 작업, 미술관이나 박물관 등 공간 디자인으로 넓어졌다"며 "요즘은 공간을 위한 디자인과 설치, 제작을 주업으로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5년 전 맡은 명품 브랜드 에르메스 매장의 쇼윈도 디자인 작업이 그 전환점이 됐다고 한다. 매년 브랜드의 테마에 따라 계절별로 네 번 윈도를 디자인해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작업이다. 그는 "주로 1대1로 만나며 소통하다가 글로벌 브랜드와 협업을 정기적으로 하다 보니 외형적으로나 질적으로 단단해 진 것 같다"고 했다.
앞으로 10년간 길종상가의 디자인 스펙트럼은 얼마나 넓어질 수 있을까. 그는 "길종상가의 작업 리스트는 '재미'라는 공통 분모 속에서 지금도 업데이트 되는 중"이라며 머쩍어 했다. "고객이 꾸준히 이어지고, 여전히 그 작업이 재미있는 걸 보면 10년 뒤에도 같은 일을 하고 있지 않을까요. 장사 잘 되는 동네 세탁소나 식당이 특별한 변수가 없는 한 그대로 있을 것 처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