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적 경제 위기로 스타트업 투자가 빙하기를 맞았다. 하지만 네이버는 오히려 "지금이 기회"라며 돈을 더 쏟아붓겠단다. 거품이 빠지면서 기술력을 갖춘 보석 같은 기업을 제대로 가려낼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 네이버 등 대기업들로서는 미래 먹거리를 적극 찾아야 하는 중요한 시기에 기술력 있는 스타트업만큼은 투자를 아끼지 않겠다는 자세다.
17일 서울 강남구 네이버 D2SF 사무실에서 만난 양상환 D2SF 리더는 "최근 10년 동안 스타트업 시장에서는 ①투자받은 돈으로 마케팅하고 ②덩치를 키워서 시장을 점유하고 ③가격을 올리는 식의 패러다임이 지배했다"며 "하지만 경제 위기가 닥치고 6개월 만에 위험에 빠진 기업이 쏟아지면서 다시 기본에 충실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위기는 분명하지만 원천 기술을 가진 기업을 찾아 투자하려는 분위기는 여전히 활발하다"고 덧붙였다.
2015년 네이버 사내 조직으로 출범한 스타트업 양성조직 D2SF는 지난해까지 스타트업 85곳에 투자했으며, 금액은 500억 원 규모에 이른다. 주로 인공지능(AI), 메타버스, 전자상거래, 헬스케어 등 기술력을 가진 스타트업에 주목한다. 올 상반기까지 19개 스타트업에 투자했는데, 지난해 상반기(12개)보다 늘어났다.
양 리더는 "우리는 나중에 투자금을 되찾는 투자 기관이 아닌 만큼 기술을 먼저 본다"며 "보통의 벤처캐피탈(VC)과 달리 네이버는 사내 기술 리더들과 함께 해당 기업의 기술력을 확인하고 협업할 대상인지 꼼꼼하게 따져 본다"고 말했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스타트업 시장에서는 실제 서비스가 없어도 주요 창업자들이 실리콘밸리 출신이라는 말만 들리면 투자금이 모였다. '묻지마식 투자'라는 말이 돌 만큼 과열됐다. 반면 D2SF가 그동안 투자한 스타트업 중 70%가량은 이미 네이버와 손잡고 있다. 가령 네이버의 인공지능(AI) 서비스 파파고, 클로바 등에는 D2SF가 투자한 AI 학습 데이터 플랫폼 기업 크라우드웍스의 기술력이 쓰였다. 기술 투자를 했다가 아예 인수까지 하는 경우도 있다.
D2SF의 투자가 네이버가 사업 방향을 정하는 데 도움을 주기도 한다. 헬스케어가 대표적이다. 아직까지 네이버는 헬스케어 분야에 본격 뛰어들지 않았지만, 이미 D2SF를 통해 20개의 헬스케어 스타트업에 자금을 넣으면서 원천 기술을 확보하고 있다. 이날도 D2SF는 개인 맞춤형 건강 플랫폼을 개발 중인 가지랩과 유전체를 분석해 질병 가능성을 시뮬레이션하는 솔루션을 개발한 프리딕티브를 새로운 투자 대상으로 발표했다.
양 리더는 벤처 업계에 자금줄이 막힌 상황에서 기술력을 갖춘 스타트업들이 대기업과 협업을 관심 있게 볼 필요가 있다고 조언한다. 최근 금산분리 완화 등 규제 완화로 인해 대기업들이 벤처캐피탈 시장에 진출할 수 있는 길이 열리면서, 회사 법인을 대주주로 하는 기업형 벤처캐피탈(CVC)이 늘고 있다. 올해 들어 동원그룹을 시작으로 GS그룹, 현대코퍼레이션, 효성그룹, CJ그룹 등이 CVC를 설립했다.
양 리더는 "대기업들은 오히려 다음 사업 아이템을 찾기 위해 스타트업계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며 "대기업이 보수적이고 의사 결정이 느리다는 선입견을 버리고 적극적으로 큰 기업과의 협업을 통해 사업 경험을 쌓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