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코리아의 손기정이다. 나는 일본 사람이 아니다. 왜 나의 우승에 일장기가 올라가야 하는가. 왜 기미가요(일본 국가)가 베를린 하늘에 울려 퍼져야만 하는가. 나라 빼앗긴 족속의 낙인을 지워버리지 못한 내 꼴이 저주스럽다.”
1936년 8월 9일 독일 베를린 올림픽 스타디움. 10만 관중은 마라톤 우승 테이프를 끊은 손기정에게 천둥 같은 환호성을 보냈다. 2시간 29분 19초, 신기록이었다. 독일 총통 히틀러마저 손기정의 손을 덥석 잡고 흔들었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 금메달을 목에 건 손기정의 표정만 빼면. 고통스럽게 뛰어 얻은 영광이 조국이 아닌 일본의 것이었기에, 손기정은 고개를 떨구고 눈물을 삼켰다.
대한민국 마라톤 영웅 고(故) 손기정 선생(1912~2002)의 자서전 ‘나의 조국 나의 마라톤’(휴머니스트)이 다시 출간됐다. 한국일보가 1983년 발행한 후 39년 만의 개정증보판이다. 일제강점기 억압받던 조선인들에게 긍지를 선사한 선생의 역사에 1988년 서울올림픽 성화 봉송, 2002년 타계 등 뒷얘기를 더했다.
"마라톤 우승의 그날까지 나는 배고픔을 이겨내야 했다." 가난했던 손기정은 주린 배를 붙잡고 달렸다. 일본 선수들을 물리치고 올림픽 대표 자리를 차지했다. 식민지 청년으로 느낀 비애는 떨칠 수 없었다. 외국에서 사인할 땐 조선지도를 그려주며 '손긔정'이라고 썼고, 해외 언론 인터뷰에선 국적을 'JAPAN'이 아닌 'KOREA'라고 했다.
국제육상계 후진국으로 멸시받던 일본은 선생의 마라톤 우승에 환호했다. 일본의 우월성을 세계에 뽐낼 선전물로 이용하려고 했다. 반대로 조선은 억압된 민족 자긍심을 고취할 각성제로 받아들였다. 동아일보 등은 올림픽 메달 수여 사진에서 손기정의 옷에 달린 일장기를 말소한 사진을 게재했다. 항거의 분위기가 감돌았다.
일본은 핏발을 세우고 선생을 감시했다. “나라 없는 민족에겐 올림픽 우승을 기뻐하고 축하할 기회조차 없었다. 올림픽 우승자도 일본인들에겐 한낱 천덕꾸러기요, 성가신 인물이었다.” 일본의 감시 등으로 선생은 더 이상 경기에 나가지 못했다. 대신 마라톤 지도자로 선수 양성에 힘썼다.
손기정의 한은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폐회식에서 풀렸다. 선생은 4년 뒤 열리는 서울올림픽을 소개할 대표자로 단상에 올랐다. “손기정, 코리아”라고 호명됐다. “올림픽에서 늘 ‘손기테이’(일본식 발음)라고 불렸던 나는 ‘손기정’이라는 소개에 신선함마저 느꼈다. 그렇다. 나는 이날이 오기를 고대하고 있었다. 나의 국적은 한국이고 이름은 손기정이라고 드디어 알리게 된 것이다. 이로써 나의 길고 긴 싸움은 끝났다.”
선생의 외손자 이준승 손기정기념재단 사무총장은 증보판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할아버지 삶에 가장 필요했던 게 무엇이었을지 생각했다. 그건 평화였다. 일제강점기가 아니었다면 슬픈 우승자가 아니라 다른 올림픽 우승자와 같이 기쁜 모습으로 금메달을 목에 걸었을 것이다.” 책은 손기정 탄생 110주년ㆍ서거 20주기를 맞아 출간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