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애니메이션 왕국' 명성이 흔들리고 있다. 애니메이션 제작사의 40%가 적자 상태이고, 애니메이터 임금 수준은 중국에 역전됐다. 극장판 애니메이션의 초대형 흥행이 잇따르고 넷플릭스 등을 통한 애니메이션의 해외 수출이 급증하고 있는데도 작품을 만드는 회사들은 심각한 경영난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다.
일본 신용조사 회사인 제국데이터뱅크가 12일 발표한 업계 동향에 따르면 애니메이션 제작사 중 2021년도(2020년 4월~2021년 3월) 결산에서 적자를 낸 기업 비율은 39.8%에 달해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2020년 ‘극장판 귀멸의 칼날: 무한열차 편’이 일본 영화 사상 최대인 400억 엔(약 3,907억 원)의 흥행 수입을 올린 이후 대형 흥행작이 쏟아진 것을 감안하면 이례적 결과다. 업계에선 중소 제작사가 난립하고 제작사에 이익이 돌아가기 어려운 구조적 문제를 원인으로 꼽는다.
애니메이션 제작사는 많은데 TV용 애니메이션 제작 편수는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다. 매년 애니메이션 시장 보고서를 발표하는 일본동영상협회에 따르면 연간 방영된 TV 애니메이션 타이틀은 2017년부터 4년 연속 전년보다 감소했다. 제작사가 받는 제작비(편당 1,000만~2,000만 엔) 수입이 줄었다는 얘기다.
애니메이션을 제작할 때 방송사, 스폰서 기업 등 여러 투자사가 ‘제작위원회’를 구성해 제작비를 지급하고 2차 판매 등 저작권 수입을 가져가는 구조도 문제다. 넷플릭스 등 해외 플랫폼을 통해 고전 애니메이션이 세계 곳곳에 다시 판매되고 있지만, 제작사는 2차 판매 수익을 얻기 어려운 구조인 것이다.
제작사의 경영난은 낮은 임금과 열악한 근무 조건으로 이어진다. 일본 애니메이터의 평균 연 수입은 440만 엔(약 4,300만 원), 신입은 겨우 110만 엔(1,075만 원)이고 한 달 휴일은 5.4일에 불과하다. 2019년에는 '시간을 달리는 소녀' 등을 만든 유명 제작사 매드하우스가 월 390시간이 넘는 장시간 노동을 시킨 사실이 드러나 노동당국에서 시정 조치를 받기도 했다. 우수한 젊은 인재가 유입되지 않아 업계 평균연령은 40대 중반에 이른다.
반면 중국의 베이징이나 항저우에서는 애니메이터의 월평균 수입이 3만~3만4,000위안(약 580~657만 원)에 달한다. 과거엔 일본 회사들이 중국에 하청을 줬지만, 최근엔 중국 자본이 일본 애니메이션 제작사를 인수해 중국 애니메이션 제작 하청을 주는 경우도 생겼다.
최근 들어 일본에선 제작 환경을 바꾸려는 노력이 조금씩 나타나고 있다. ‘귀멸의 칼날’ 애니메이션 제작사는 하청을 주는 대신 직접 고용 비중을 높여 작품의 질을 개선했다. 제작위원회에도 직접 참여해 2차 판매 수입도 챙기고 있다. 넷플릭스는 신인 애니메이터의 생활비 지원 프로그램을 시작했고, 반다이남코는 경험 없는 초보자도 애니메이션 제작을 배울 수 있는 제도를 운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