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정권에서 실시한 서민채무지원, 이른바 '빚 탕감' 정책의 완제율이 60% 수준인 것으로 확인됐다. 10명이 원금의 절반 정도를 탕감받아 채무 조정 절차에 들어간 결과, 6명이 남은 빚을 모두 갚고 경제적 재기에 성공했다는 뜻이다. 나머지 4명은 탕감에도 불구, 빚의 굴레에서 결국 벗어나지 못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한국일보는 서민채무지원 정책을 주도한 한국자산관리공사(캠코)에 요청한 자료를 바탕으로 지난 정권들(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문재인 정권)의 '빚 탕감' 정책 성과를 살펴봤다. 현재에 적용할 만한 통찰력을 얻기 위해서다. 해당 자료들이 집계되고 분석된 건 이번이 처음이다. 마침 윤석열 정부의 빚 탕감 정책 '새출발기금'은 조만간 확정·발표·출범을 앞두고 있다.
4개 정권이 포함된 지난 18년간 서민채무지원 정책의 채무 조정 약정자(수혜자)는 총 146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집계됐다. 수혜자는 각 정책별 배드뱅크와 협의를 통해 원금·이자 등을 감면받는 대신 남은 채무를 완납하겠다는 계약을 맺는다. 배드뱅크는 수혜자들의 부실 채권을 인수하는 한시적 구조조정 기구다.
구체적으로 2004년 노무현 정부 당시 출범한 '한마음금융'과 2005년 시작한 '희망모아'는 2020년 말 청산될 때까지 각각 신용불량자(금융채무불이행자) 18만 명과 64만 명의 채무 조정을 실시했다. 이어 이명박 정부 때 출범한 '신용회복기금'을 확대·개편한 박근혜 정부의 '국민행복기금'은 2013년부터 올해 6월까지 64만 명을 지원했다. 문재인 정부 때 나온 '장기소액연체자 지원대책'은 국민행복기금 성과에 포함됐다. 다만 해당 자료에서 신용회복기금(2008~2012년) 관련 통계는 캠코의 관리 소홀로 집계가 불가능한 상태다.
18년간 서민채무지원 정책으로 재기에 성공한 이들은 총 88만 명이다. 사업별로 △한마음금융 10만 명 △희망모아 37만 명 △국민행복기금 41만 명이다.
정책 성과를 좌우할 완제율(빚을 다 갚은 비율)은 60.2%로 나타났다. 서민채무지원 정책이 일회성 '빚 탕감'으로 끝나지 않으려면 수혜자들의 완제 여부가 중요하다. 통상 은행들의 부실채권(3개월 이상 연체) 비율이 1% 안팎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역대 '빚 탕감' 정책들의 완제율은 굉장히 낮다고도 볼 수 있다. 다만 캠코 자료 관리 부실로 인해 완제자 수(2017년 말)와 수혜자 수(2020년 말)의 집계 시점이 달라, 실제 완제자 수와 완제율은 더 늘어날 수 있다.
전문가들은 수혜자의 특수성에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정민 서울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일반 차주가 아닌 자력으로 상환이 어려운 저신용·저소득 차주가 정책 수혜자임을 명심해야 한다"며 "결과적으로 해당 정책이 없었다면, 88만 명은 여전히 정상적인 사회 복귀가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유경원 상명대 경제금융학부 교수도 "한시적인 기구가 시행한 정책의 성과를 다른 기관의 관련 수치와 비교하는 건 조심스럽다"면서 "다만 수혜자 상당수가 이미 인생의 밑바닥까지 몰렸다는 점을 고려하면 상당히 높은 수치"라고 말했다.
윤석열 정부가 출범시키는 새출발기금뿐 아니라 역대 모든 서민채무지원 정책은 원금 탕감으로 인한 '도덕적 해이' 논란에 시달렸다. 채무자가 일부러 고액을 연체한다거나, '버티면 결국 (정부가) 깎아 준다'는 인식을 조장한다는 비판이 골자다.
그간 수혜자들은 통상 절반 안팎의 빚을 탕감받았다. 한마음금융·희망모아의 채무감면율은 40~55%, 국민행복기금은 40~60%를 기록했다. 전체 탕감 금액은 △한마음금융 약 9,000억 원 △희망모아 약 3조 원 △국민행복기금 약 5조 원 등 약 8조9,000억 원이다.
전문가들은 원금 탕감 그 자체보다 그로 인한 부수적 효과를 함께 눈여겨봐야 한다고 조언했다. 유 교수는 "원금 채무는 거시경제적 위기로 이어질 수 있는 중대 위험 요소이기 때문에 탕감을 통해서라도 위험도를 낮출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박 교수는 "원금 탕감에 들어간 비용보다 채무자들의 경제적 재기로 얻어진 사회적 이득이 더 크다"고 주장했다.
'고의적 고액 연체' 논란은 실제보다 우려가 과도한 것으로 평가된다. 정책별 수혜자의 연평균 소득 수준을 살펴보면 △한마음금융 1,393만 원 △희망모아 982만 원 △국민행복기금 1,477만 원으로 나타났다. 채권액은 △한마음금융 1,089만 원 △희망모아 984만 원 △국민행복기금 1,551만 원 수준이다. 즉 수혜자 상당수는 저소득 서민층이었고, 고액이 아닌 통상 1,000만 원 안팎의 소액 채무로 인해 경제적 파산 위기에 내몰린 상태였다.
다만 '버티면 결국 깎아 준다'는 우려는 일부 사실로 확인됐다. 이는 새 정부가 들어설 때마다 원금감면율을 상향했고, 이에 따라 이전 정부가 내놓은 정책들의 원금감면율도 함께 올랐기 때문이다.
예컨대 △한마음금융·희망모아는 원칙상 원금 감면 불가(일시상환만 30% 감면) △국민행복기금은 원금 감면 최대 50%(기초생활수급자 등 특수 채무자는 최대 70%)를 내세웠지만, 실제 집행된 한마음금융·희망모아의 채무감면율은 40~55%, 국민행복기금은 최대 60%까지 높아졌다. 2004년 한마음금융의 첫 수혜자는 원금 감면을 받지 못했으나, 2013년까지 버틴 차주는 최대 60%까지 원금 감면을 받을 수 있었다는 얘기다.
물론 수혜자의 고의성과 채무감면율 상향은 구분될 필요가 있다. "이미 경제적 극단에 몰린 수혜자가 상당 기간 고의적으로 채무 불이행자로 남으면서까지 소액 채무에 대한 추가 감면을 전략적으로 기대했다고 보긴 어렵다"(유 교수)는 것이다.
윤석열 정부는 역대 최대 규모의 서민채무지원 정책 발표를 앞두고 있다. '윤석열표' 배드뱅크인 '새출발기금'은 부실 또는 부실이 우려되는 채권을 무려 30조 원이나 매입할 예정이다. 원금감면율 역시 부실 차주의 경우 최대 90%까지 가능하다. 규모·원금감면율 모두 이전 정부들 대비 가장 강력한 '빚 탕감' 정책이다.
'역대급' 규모 만큼이나 새출발기금을 둘러싼 논란 역시 뜨겁다. 특히 도덕적 해이를 둘러싼 논쟁은 정부가 서민채무지원 정책을 내놓은 지 18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다. 다만 이번 분석을 통해 '완제율 60.2%' '역대 수혜자 상당수는 소액 채무에 시달린 저소득 서민층'이라는 구체적 사실이 새롭게 밝혀진 만큼 △완제율 추가 상향 △일자리 연계 프로그램 강화 등 개선 방안이 향후 도덕적 해이 우려를 덜어낼 변수가 될 것으로 보인다.
박 교수는 "정부가 큰 그림을 던져 놓았지만 결국 정책의 성패를 좌우하는 것은 디테일"이라며 "완제율을 추가로 높이고, 채무자들의 안정적 소득 창출 방안을 마련해 도덕적 해이 우려를 완화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