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저출산 고령화시대, 더 친절한 도시환경은 필수
자폐스펙트럼 장애를 가진 변호사의 이야기를 그린 드라마가 화제다. 이 드라마는 장애인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인식을 되돌아보게 할 뿐 아니라 우리가 사는 공간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하게 한다. 예컨대 자동 회전문도 누군가에겐 장애물이 될 수 있다는 것인데 미처 느끼지 못했던 일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최근 논란이 된 장애인 단체의 출퇴근시간 지하철 탑승 시위도 조금 더 이해할 지점이 있을 것이다. 장애인뿐 아니라 어린이와 노인, 외국인이 함께 사는 우리 삶의 공간은 어떻게 만들어야 할까.
미국 건축가, 로널드 메이스(Ronald L. Mace)는 아홉 살 때 소아마비를 앓은 후 평생 휠체어를 타야 했다. 그는 건축대학 재학 시절, 휠체어로 접근이 불가능한 대학 시설을 경험하며 장애인의 접근성 향상을 위한 건축설계 원칙을 세우는 데 매진하게 된다. 1973년 미국 최초로 시행된 ‘노스캐롤라이나 접근가능-건축법(North Carolina’s Accessible-Building Code)’의 초안 작성에 깊이 관여했고, 장애인을 위한 설계원칙을 수립하고 법을 개선하는 데 평생을 바쳤다.
마침내 1997년, 메이스의 주도로 ‘유니버설 디자인(Universal design)’의 개념과 7가지 원칙이 정리됐다. 유니버설 디자인이란 장애인, 어린이, 노인, 임산부, 외국인 등 신체적인 차이나 인종 및 언어의 다름에 상관없이 우리 삶의 공간을 안전하고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7가지 원칙을 간단히 살펴보자. 우선 ‘평등성(Equitable use)’은 장애 여부나 키와 같은 신체적 차이에 구애 받지 않고 동등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설계한다는 것이다. ‘유연성(Flexibility in use)’은 선호에 따라 유연하게 사용할 수 있는 설계를 말하는 것으로 오른손잡이와 왼손잡이가 같이 사용할 수 있는 가위 같은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간단명료성(Simple and intuitive use)’은 지식이나 경험의 차이와 상관없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설계한다는 것이다.
‘인지성(Perceptible information)’은 인지능력에 관계없이 쉽게 인지할 수 있도록 하는 것으로, 지하철 노선별로 색깔을 달리하여 환승유도선을 만들어놓은 것이 좋은 예다. ‘오류 허용성(Tolerance of error)’은 예기치 못한 사고가 일어나도 그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설계를 하라는 것으로, 비상시 안전을 위한 출입문 정지센서 같은 것이 대표적이다. ‘체력소모 최소화(Low physical effort)’는 가능한 한 힘을 들이지 않고 이용하게 설계하라는 것으로, 예를 들면 휠체어에 앉아서도 지하철 매표기를 이용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다. 마지막 일곱 번째는 ‘충분한 크기와 공간(Size and space for approach and use)’으로 이를 테면 휠체어도 충분히 지나갈 수 있는 출입구나 지하철 통로와 같은 것이다.
유니버설 디자인은 신체적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자유롭게 이동하고 접근할 수 있는 환경을 지향하는 ‘무장애 설계’와 유사하다. 여기에 어린이나 임산부도 포함해 모든 시민이 자유로운 이동과 접근이 가능한 도시환경을 만들자는 것이니 더 넓은 대상을 아우른다. 예컨대 유아를 동반한 부모를 위해 유모차주차장을 마련한다거나, 키가 작은 어린이를 위해 버스 좌석 한 귀퉁이에 손잡이를 달고 지하철에 철제봉을 설치하는 것이 유니버설 디자인이다. 버스나 천장에 달린 손잡이는 높아서 아이들이 잡을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이 잡을 수 있도록 설계한 것이다.
건축물에서 출발한 배려설계는 점점 더 확산되는 추세지만, 도시 차원에서는 아직 갈 길이 멀다. 보도 턱 낮춤이나 장애인 화장실 설치 정도로는 도시적 차원의 유니버설 디자인을 실현했다고 보기 어렵다. 건물이 아닌 도시 스케일에서는 어떤 노력들이 더 필요한지 생각해보자.
앞서 소개한 대로 유니버설 디자인의 원칙 중에는 ‘체력소모 최소화’와 ‘충분한 크기와 공간’이 있다. 지하철역을 예로 들어보자. 엘리베이터를 설치하고 장애인 통과대를 따로 마련하는 것이 이에 해당한다. 그런데 이러한 개별 시설이 잘 갖추어진다 해도 도시적 차원의 유니버설 디자인 없이는 그 효과가 반감된다.
만약 장애인이나 고령의 노인이 집에서 나와 버스로 지하철역까지 간다고 하자. 버스 타고 지하철역까지 가는 과정이 너무 힘들어 이동을 포기한다면 지하철역의 유니버설 디자인은 큰 의미가 없을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휠체어 이용자를 위한 보도 턱 낮춤, 저상버스의 도입과 버스 내의 장애인 공간은 매우 의미가 깊다. 결국 보도와 저상버스, 지하철 시설이 함께 준비돼야 진정한 이동권이 확보되는 것이다.
환승 시에도 도시 차원의 유니버설 디자인이 필요하다. 버스에서 내려 다른 버스나 지하철을 이용하기 위해서는 일정 거리를 스스로 이동해야 하는데, 그 거리가 부담스러운 경우가 많다. 지하철역은 주로 교차로에 있지만 버스정류장은 교차로에서 상당히 떨어져 있기 때문인데, 버스 정류장을 교차로에 바로 붙여서 만들면 차량소통에 방해가 되므로 위치를 그렇게 정한 것이다. 자동차 중심의 도시설계원칙이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는 얘기다. 두 다리 멀쩡한 사람들에게도 먼 거리이니 장애인이나 임산부에게는 말해 무엇하랴.
유니버설 디자인을 도시 스케일로 확장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공간구조다. 가능한 한 이동거리를 줄여주는 효율적인 공간구조가 필수적이다. 파리를 비롯해 많은 도시에서 지향하고 있는 ‘보행만으로 일상 생활이 가능한 소생활권’ 중심의 모자이크형 도시구조를 만들 필요가 있다. 이동할 수는 있지만 거리가 멀다면 이동 의지가 약해지고 결국엔 포기하게 된다. 이런 마음이 생기는 것은 장애 여부나 연령에 상관없이 비슷하다. 결국 이동거리를 최소화할 수 있도록 주요시설을 골고루 분포시키고 그물망처럼 촘촘하게 보행로를 연결하는 것이 도시 스케일 유니버설 디자인의 핵심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사회적 약자를 위한 도시설계는 결코 그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불편한 사람들이 편하게 살아갈 수 있는 도시는 당연히 비장애인에게도 편안하고 안전한 공간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앞서 예로 든 저상버스는 장애인, 노약자뿐 아니라 건장한 청년들에게도 훨씬 편안한 교통수단이다. 이용빈도로 보면 비장애인이 훨씬 더 자주 혜택을 누리고 있을 것이다.
장애인을 위한 것이 모두를 위한 것이라는 예는 주변에서 아주 흔하게 만날 수 있다. ‘자동변속기’는 장애인들의 자동차 운전에 크게 기여했는데, 가장 큰 혜택을 본 사람들은 오히려 비장애인이다. 모든 운전자가 훨씬 더 편하게 운전을 하게 된 것이다. 최근 출고되는 차량 대부분이 자동변속기를 장착하고 있는 것이 이를 방증한다. 자율주행이 본격화되면 더 많은 장애인들이 안전하게 운전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많은 비장애인들이 자율주행을 통해 혜택을 누리게 될 것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어린 시절을 거치고, 장애를 입을 수도 있으며, 마지막에는 결국 노인이 돼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약한 존재가 된다. 그러므로 도시환경은 최적의 건강상태를 가진 사람들을 기준으로 설계돼서는 곤란하다. 기준은 약자가 돼야 한다. 저출산으로 위기가 닥친다고 생각한다면 더더욱 그러하다. 그들이 편안하고 안전하게 살 수 있는 환경을 만들지 않고 어떻게 더 많은 아이를 낳고 기르기를 바랄 수 있는가. 결국 도시차원의 유니버설 디자인을 통해 약자를 위한 도시공간구조를 만들어 모두가 행복하고 안전한 삶을 사는 공간으로 만드는 데 기여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김진유 경기대학교 도시·교통공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