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개월 전 통계청 발표만 보면 근로소득이 있는 월급쟁이의 사는 형편은 적어도 1년 전보다 나아진 것처럼 보인다. 벌이도, 씀씀이도 커졌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 진단에 수긍할 직장인이 얼마나 있을까.
겉으로 보이는 직장인의 명목 소득·소비는 늘었을지언정 실제 삶은 팍팍해진 게 현실이다. 이유는 분명하다. 물가가 너무 올라 임금이 높아져도 돈을 쓰던 만큼 쓸 수 없는 상황, 즉 실질소득이 줄었기 때문이다.
고물가 충격이 상륙한 1분기부터 직장인의 삶은 후퇴 조짐을 보였다. 1분기 누적 물가는 3.8% 올랐는데 지난해 연간 상승폭인 2.6%를 크게 웃돌았다. 그 결과 지난해 3분기 4.8%였던 전국 근로자 가구의 평균 실질소득 증가폭은 1분기에 3.2%까지 떨어졌다. 지난해 3분기와 올해 1분기 근로자 가구 명목소득 증가폭이 각각 7.5%, 7.2%로 비슷했던 점을 고려하면 고물가가 실질소득을 얼마나 위축시켰는지 가늠할 수 있다.
근로자 가구 실질소득은 지난해 1, 2분기 각각 1.2%, 2.8% 감소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를 근거로 실질소득이 증가한 올해 1분기가 더 낫다고 보긴 어렵다. 지난해 상반기는 코로나19에 따른 경기 악화로 명목임금마저 소폭 증가(0.3%·1분기)하거나 오히려 감소(-0.4%·2분기)했기 때문이다.
소득 구간을 5개로 쪼개 보면 고물가 여파는 불평등했다. 소득 상위 20%인 5분위는 실질임금이 전년과 비교해 9.0%(94만8,000원) 늘어난 1,144만 원인 반면, 중산층 직장인인 2, 4분위는 실질임금이 감소했다. 3분위는 실질임금이 그대로였고, 소득 하위 20%인 1분위는 실질임금이 0.8% 증가하는 데 그쳤다. 서민·중산층 월급이 물가 상승 영향을 크게 받았다는 뜻이다.
문제는 고물가 충격이 이제 시작이라는 점이다. 물가 상승률은 1분기 3.8%에서 1~7월 누적 4.9%로 뛰었다. 9, 10월 정점을 찍을 것이란 정부 진단을 보면 연간 물가 상승률이 외환위기 당시인 1998년(7.5%) 이후 처음 5%대를 웃돌 가능성도 있다. 실질임금이 갈수록 위축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실제 2분기 직장인 임금 현황을 엿볼 수 있는 고용노동부 사업체노동력조사 결과, 300인 미만 기업체의 1인당 월평균 실질임금은 5월 기준 306만 원으로 전년 대비 1.2% 줄었다. 4월에 이어 2개월 연속 감소세다. 반면 300인 이상 기업체 종사자는 5월 실질임금이 2.6% 증가한 475만 원이었다.
서민·중산층 직장인의 실질임금이 줄고 있지만 임금 협상 시 노동조합 측 최저선인 물가 상승률만큼 월급을 올려달라는 요구도 쉽지 않다. 정부가 '물가 안정을 위해 대기업 임금 인상을 자제해달라'는 메시지를 직접 내면서 직장인 월급이 물가 위협 요인으로 찍혔기 때문이다.
물론 물가 측면에서만 보면 임금 인상은 수요와 가격 상승을 자극할 수 있다. 한국은행은 지난달 낸 '물가-임금 관계 점검 보고서'에서 임금이 약 1%포인트 오르면 1년 후에 외식 등 개인 서비스 물가가 0.2%포인트 높아진다고 분석했다. 고물가로 상승한 임금이 다시 물가를 올리는 악순환이다.
하지만 정부가 고물가에 따른 고통 분담을 직장인에게만 요구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물가 상승을 틈타 제품값을 크게 높이거나 과도한 이윤을 챙기는 기업에 대해선 입을 닫고 있다는 얘기다. 이와 관련 국회 입법조사처는 고물가의 주원인인 고유가로 떼돈을 벌고 있는 정유사의 초과 이익에 적용할 횡재세 논의를 공론화해야 한다는 입장을 내놓기도 했다.
정세은 충남대 경제학과 교수는 "생계비를 보장하는 수준의 임금 인상 요구는 잘못됐다고 보기 어렵다"며 "현재 고물가는 국제 유가 등 대외 공급 측면에서 비롯된 면이 크기에 기업과 노동자가 함께 감내할 부분이 있다"고 말했다.
이정우 경북대 명예교수는 "고물가 시기인 1970년대에 노동자 임금과 기업 제품 가격 인상을 자제하자는 사회적 합의가 전 세계적으로 유행했는데 현재도 유효한 정책"이라며 "이를 추진하려면 정부가 앞장설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