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 사태 또 올 수도"...남아시아 통화가치 폭락에 줄도산 위기

입력
2022.08.05 09:20
스리랑카 국가부도·파키스탄 구제금융 신청
방글라데시, 의류산업 위기로 차관 요청
미 연준 금리 인상에 신흥국 통화가치 폭락
외국인 자본 이탈·인플레, 경제위기 악순환

남아시아 신흥국들이 통화 가치 폭락과 외채 부담 증가로 줄도산 위기에 내몰렸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ㆍ연준) 등 주요국 중앙은행들이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기준금리 인상을 가속화한 데 따른 여파다.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가 재현될 수 있다는 우려도 크다.

파키스탄·방글라데시·스리랑카 남아시아 경제 ’휘청’

3일(현지시간)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남아시아 국가들은 최근 잇따라 국제통화기금(IMF)에 ‘SOS’ 요청을 보내고 있다. ①파키스탄은 지난달 중순 IMF로부터 11억7,000만 달러(약 1조5,300억 원)를 추가 지원받기로 합의했다. 앞서 2019년에 3년간 60억 달러(약 7조 8,500억원)를 받는 구제금융안에 서명했으나 세수 확대 관련 이견으로 지원이 중단됐는데, 극심한 경제난에 버티기 힘들어지자 결국 IMF 요구 조건을 따르기로 했다.

의류 생산 대국으로 비교적 탄탄한 경제 성장을 이어 온 ②방글라데시도 닥쳐오는 파도를 넘지 못했다. 국가 부도 상황에 투입되는 구제금융은 아니지만, 취약국 지원용 기금에서 45억 달러(약 5조9,000억 원) 차관을 신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수출 80%를 차지하는 의류 산업이 에너지 부족과 주문량 감소로 어려움에 처한 탓이다.

그나마 파키스탄과 방글라데시는 사정이 나은 편이다. 올해 5월 디폴트(채무 불이행)를 선언한 ③스리랑카는 지난달 시민 저항으로 정부가 무너져 IMF 원조를 위한 조건조차 충족하기 어려워지자 중국에 손을 벌렸다. 팔리타 코호나 주중 스리랑카 대사는 “중국과 40억 달러(약 5조2,300억 원) 원조 협상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1997년 외환위기 판박이… 금리 인상 여파 신흥국 강타

최근 신흥국 경제 위기는 1997년 7월 태국에서 시작돼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필리핀, 싱가포르, 한국 등을 집어삼킨 아시아 금융위기 사태를 떠올리게 한다. 당시 공황에 빠진 대출기관들은 조기 상환을 요구했고, 투자자들은 남미와 러시아 등 신흥시장에서 주식과 채권을 대량 회수했다. 급기야 외환 보유고가 말라버린 일부 국가들은 1998년 디폴트에 빠지기까지 했다.

파키스탄 비영리 금융 컨설팅 단체 ‘카란다즈 파키스탄’의 아마르 하비브 칸 위험관리책임자(CRO)는 “남아시아 국가들은 지난 10년간 저비용으로 달러를 빌려 여유롭게 썼다”며 “요즘 분위기는 1997년 동남아시아와 흡사하다”고 진단했다.

이번 신흥국 경제 붕괴의 도화선이 된 것은 금리 인상 물결이다. 미국 연준이 물가 안정을 목표로 금리 인상에 나서자 달러값이 치솟았고, 신흥국 통화 가치는 폭락했다.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지난달 28일 기준 달러 대비 스리랑카 루피화 가치는 지난해 말과 비교해 43.8% 추락했고, 파키스탄 루피화는 25.5%, 방글라데시 타카화는 9.1% 각각 하락했다.

각국 정부의 부채 부담은 연쇄적으로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빚 규모가 늘지 않았어도 달러로 갚아야 하는 이자나 원리금은 환율 상승 폭만큼 늘어나기 때문이다. 상대적으로 외환 보유액이 많지 않은 신흥국에는 치명타다. 게다가 경기침체 우려에 안전 자산으로 눈을 돌리게 된 외국인 자본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면서 외채 상환에 버거워하는 신흥국 경제를 더욱 악화시키고 있다. 국제금융협회(IFF)에 따르면 연준의 금리 인상이 시작된 3월부터 5개월간 신흥국 주식ㆍ채권 시장에서 이탈한 자금은 무려 380억 달러(약 49조7,600억 원)에 달했다.

대통령 축출까지... 경제난→정치 카오스

우크라이나 전쟁이 촉발한 연료 가격 폭등과 인플레이션은 또 다른 위험 신호다. 도탄에 빠진 민생 경제는 정치 혼란을 불렀고, 또 다시 국가 경제난을 심화시키는 악순환으로 이어지고 있다. 파키스탄의 경우 몇 달 사이 경유 가격이 100% 넘게 치솟고 전기 가격도 50%나 올랐는데, 정부가 세수를 늘리기 위해 영세한 자영업자에게 세금까지 부과하자 전국에서 반정부 시위가 불붙었다.

스리랑카도 코로나19 대유행 이후 관광산업 붕괴, 대외 부채 급증, 재정 정책 실패로 경제가 파탄났다. 분노한 국민들은 수개월간 시위를 벌였고, 지난달 대통령을 권좌에서 끌어내렸다. 새로운 정부가 들어섰지만 여전히 생필품 부족과 물가 폭등은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크리스탈리나 게오르기에바 IMF 총재는 최근 언론 인터뷰에서 “신흥국의 3분의 1, 저소득국 3분의 2가 빚더미에 앉은 상태”라며 “세계가 침체의 소용돌이에 빠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김표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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