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시절, 친구가 어머니와 이야기하다 충격받았다며 들려준 이야기.
“엄마가 (나이를 먹어가니) 앞으로 찾아올 좋은 시절을 많이 못 누릴까봐 슬퍼.”(친구)
“넌 왜 세상이 더 좋아질 거라고만 생각하냐.”(친구의 어머니)
친구도, 나도 놀랄 만했다. 새로운 세대는 이전 세대가 이룬 성과와 시행착오를 토대로, 더 나은 교육을 받고 지성을 펼치며 계속 앞으로만 나아가는 것이라 믿던 때였으니까.
이젠 친구 어머니의 말이 옳다는 걸 안다. 많은 믿음이 허물어졌다. 과거 어떤 한심한 기성세대에게서 듣던 답답한 차별과 혐오의 말을(미래에는 사라질 것이라 믿었던 그 말을), 해사한 요즘 젊은이들(심지어 어린이들)의 입으로 다시 또, 더 많이 듣는 황망한 기분이란. 20대 청년(남성)이 사회에서 가장 보수적일 수 있다니, 이것도 상상해보지 못했다.
한국 밖을 봐도 놀랍긴 마찬가지다. 미국의 연방대법원은 임신중지권(낙태권)을 없애고 1973년 이전으로 여성 인권을 후퇴시켰다. 미얀마는 군부 독재로 회귀했으며, 러시아는 대체 명확한 이유를 찾을 수 없는 대대적인 살생, 끝없는 전쟁의 고통을 안겨주고 있다.
그래도 혹자들은 말한다. 객관적인 수치를 보면, 분명 한국 사회를 포함해 세계의 저변에서는 인권의식이 향상되고 절대적 빈곤이 줄어들어왔다고. 우린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하지만 여기저기 널린 구체적인 고통 앞에서, 평균적 수치란 기만의 얼굴일 뿐이다. 우리 부서(어젠다기획부) 마이너리티팀 기자들이 조선소에서 일하다가 전업한 노동자들을 인터뷰했다. 오전·오후 단 10분씩을 쉴 수 있고, 그 시간에만 화장실에 갈 수 있다고? 산업재해를 신청하려고 하면 업계 블랙리스트에 올려 못하게 협박한다고? 하루 15시간을 일할 때도 고작 월 260만 원을 받았다고? 사람이 죽어도 “죽었네”하고 마는 곳, “노조 도움 없었으면 나는 자살하고, 아이들은 고아원에 가지 않았을까” 싶은 곳이란다. 찰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즈’, 전태일의 ‘평화시장’이 과거가 아니라 바로 우리 옆에 있었네. 기자들이 이런 노동자들을 찾는데 며칠도 안 걸렸을 정도로, 흔하고 보편적인 사례라는 게 또 하나의 놀라움이었다.
하청의 세계가 썩어 문드러지도록, 간접고용 노동자들을 차별하고 쥐어짜는 구조를 방치하고, 산재 신청 방해라는 불법이 판을 치도록 내버려 둔 고용노동부는, 그 결과로 곪아 터진 파업을 향해선 ‘법과 원칙’ 운운하며 찍어 눌렀다. 현재 조선업계가 겪는 인력난은, ‘노동지옥’이 되도록 사측 편만 들어온 정부 책임도 상당하다.
한 노동자는 말했다. “거긴(조선소는) 21세기가 아니에요. 조선시대에 지주에게 착취당하던 소작농들의 현장 그 자체예요.” 그의 말대로 1997년 외환위기 이후, 한국 사회의 시공간은 나뉘었다. 정규직(고임금, 안전한 환경, 고용안정)과 비정규직·하청(낮은 임금, 위험한 환경, 고용불안)의 세계로.
어쩌면 모두가 힘든 사회보다, 지옥을 한쪽에만 몰아주고 그를 밟고 다른 쪽만 풍요를 누리는 사회가 더 최악이 아닐까. 하청 노동자들이 21세기가 아닌 그곳에서, 무딘 현실을 향해 송곳처럼 한번 찔러본 것이 이번 조선 파업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늘 그렇듯, ‘21세기 사람들’에 의한, 다시 한번의 짓밟기였다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