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융자금 없음' '안심전세대출 한도 80~90%' '자금 걱정마시고 일단 연락주세요'
신축 빌라 전세 매물을 검색하면, 한결같이 달린 홍보 문구다. 집주인이 빌라를 담보로 대출을 안 받아 등기(권리관계가 정리된 국가 서류)가 깨끗하니 주택도시보증공사(HUG) 같은 보증기관에서 전세보증금 반환보증이나 금융권 전세대출을 받는데 아무런 하자가 없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현재 시중은행이나 HUG(안심전세대출)는 전셋값의 80%까지 빌려준다. 기준을 충족한 신혼부부 또는 청년가구는 보증금의 90%까지 대출을 받을 수 있다. 전세를 알아보던 세입자로선 '등기도 깨끗하고, 정부 보증도 받을 수 있다는데 이왕이면 대출받아 새 빌라에 들어가는 게 낫지 않나'하고 혹할 수밖에 없다. 융자금 없다는 이 집, 안전한 걸까.
결론부터 얘기하면 이런 집은 최근 논란이 된 전세 사기의 핵심 고리인 '동시진행' 매물일 가능성이 크다. 동시진행은 아파트에 견줘 매매가 어려운 빌라(신축·구옥) 같은 다세대주택을 팔기 위해 고안된 분양기법인데, 핵심은 세입자 전세금으로 분양대금(매맷값)을 치르는 것이다.
한국일보와 인터뷰한 복수의 업계 관계자는 동시진행이 지난 정부 때부터 성행하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당시 정부가 집값을 잡는다며 주택담보대출을 크게 조이자, 대출 문턱이 낮은 전세대출을 활용해 빌라를 처분하는 변칙적인 기법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원리는 간단하다. 빌라는 매매는 잘 되지 않지만 전세 수요는 넘쳐난다. 신축 빌라는 더 경쟁력이 있다. 더구나 빌라는 아파트처럼 시세가 정교하지 않다. 집주인과 동시진행으로 빌라를 처분하기로 한 부동산 컨설팅 업자는 전셋값을 최대로 높인다. 어떻게 이게 가능할까 싶지만, 감정가를 부풀려 매맷값을 끌어올리고 전셋값을 분양가와 똑같이 맞추면 간단히 해결된다.
그래도 빌라 처분엔 문제가 없다. 전세대출 한도가 넉넉한 데다 빌라 시세 정보가 없다 보니 세입자도 굳이 시세를 따지려 들지 않는다. 오히려 괜찮은 빌라를 싸게 잡았다고 여길 가능성이 크다. 동시진행 매물의 경우 중개업자가 1,000만 원 안팎의 지원금까지 얹어주기 때문이다.
결국 동시진행을 위한 첫 단추이자 관건은 전세대출이다. 분양 관계자 A씨는 "특히 젊은 세입자들은 전세대출을 끼고 빌라 전세를 구하기 때문에 업자들이 가장 먼저 하는 게 근저당을 전부 말소해 깨끗하게 만드는 것"이라며 "'융자금 없음'은 동시진행을 위한 첫 작업"이라고 말했다. 깨끗한 집이라고 믿고 들어갔지만, 동시진행의 다음 단계인 집주인 변경 과정에서 이런 믿음은 깨진다. 새로 바뀐 집주인이 이미 빚을 잔뜩 진 경우라면 당연히 보증금 반환에 문제가 생긴다.
HUG의 보증제도도 전세 사기에 악용되고 있다. HUG는 빌라의 경우 전셋값이 공시가의 150% 이내면 전셋값이 매맷값과 같아도 보증서를 내준다. 문제는 공시가 150%를 적용하면 웬만한 빌라는 전셋값이 매맷값을 웃돌게 된다. HUG 관계자는 이에 대해 "빌라는 적정 시세가 없어 공시가 기준만 충족하면 보증서는 내준다. 매맷값보다 높지만 않으면 된다"고 말했다. 결국 손쉬운 전세대출과 넉넉한 공시가 기준이 역설적으로 전세 사기의 통로로 이용되고 있다는 게 업계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실제 문재인 정부 출범 직후인 2017년 6월 52조8,189억 원이었던 전세대출액(5대 시중은행 기준 잔액)은 지난해 6월 말 기준 148조5,732억 원으로 4년 만에 2.8배 뛰었다. 이 기간 전세보증 사고도 급증했다. 전세보증의 94%를 감당하고 있는 HUG에 따르면 2018년 792억 원 수준이던 사고 금액이 지난해 5,790억 원으로 3년 만에 7배 이상 증가했다.
2일 포털사이트 네이버에 강서구 신축 빌라를 검색하면 전세 매물(1,237건)이 매매(369건)보다 3배 이상 많다. 업계 관계자들은 강서구 전세 매물의 90%가 동시진행 매물로 추정된다고 설명했다.
분양 관계자 B씨는 "대부분 손쉬운 전세대출과 HUG 보증을 내세워 세입자를 모집한다"며 "동시진행 매물을 공유하는 전용 카톡방이 생겨난 것도 2020년 3월쯤"이라고 말했다. 이어 "처음엔 HUG 보증 덕분에 세입자도 보증금을 떼이지 않아 당장은 문제가 없었다"며 "그러다 보니 강서구에서 시작된 동시진행이 전국으로 퍼지면서 예기치 못한 부작용이 터지기 시작했는데, 정부가 단속만 강조할 게 아니라 제도 허점을 제대로 살펴봐야 한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