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절'의 철조망을 안에서 허문 이들

입력
2022.08.02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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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나치 수용소 봉기

나치 독일은 정치범, 특히 공산주의자와 사회주의자를 수감하기 위한 특별 감옥으로 수용소를 지어 운영하다 1935년 무렵부터 인종적 유전학적 배제 수단으로 썼고, 2차대전 중 ‘최종 해결(final solution)', 즉 유대인 등의 학살에 본격적으로 활용했다. 동유럽 전역의 게토 유대인들이 전쟁 발발과 거의 동시에 대규모로 멸절 수용소로 이송되기 시작했고, 적어도 게토 유대인들에게는 대량 학살 사실이 풍문처럼 알려졌다.

1941~43년 사이 게토 유대인들이 밀수한 무기 등으로 자체 저항군을 조직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대표적인 게 폴란드 바르샤바 게토 유대인이 조직한 유대인 저항군 ‘ZOB(Zydowska Organizacja Bojowa)’였다. ZOB는 수송열차 탑승 거부운동을 조직화하고 이송 당일 독일군을 공격해 얼마간의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그들의 이른바 ‘바르샤바 게토 봉기’는 1942년 하반기부터 게슈타포의 대규모 소탕전이 마무리된 이듬해 5월 16일까지 이어졌고, 이후 소수의 생존자는 파르티잔 조직에 흡수됐다.

게토 봉기 소식은 ‘가스실 소문’과 더불어 수용소 수감자들에게도 알려졌다. 사실 시체를 소각한 것도 유해를 묻기 위한 대규모 구덩이를 판 것도 ‘특수부대(Sonderkommando)’라 불린, 수감자들이었다. 트레블링카 수용소 수감자 1,000여 명이 1943년 8월 2일, 삽과 곡괭이 등을 들고, 일부는 무기고에서 훔친 총을 들고 수용소에 불을 지르며 봉기했다. 다수가 희생됐지만, 300여 명이 탈출에 성공했고, 그중 약 3분의 1이 독일군의 추격을 따돌리고 마지막까지 생존했다.

유대인 수용소 봉기는 1943년 10월 폴란드 소비보르 수용소 봉기와 1944년 10월 아우슈비츠 유대인 시신 소각 특수부대 무장 봉기, 1945년 1월 헤움노 수용소 집단 탈출 등으로 이어졌다.

최윤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