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초안을 무단 폐기한 혐의로 기소된 노무현 정부 청와대 인사들이 9년 만에 유죄를 확정받았다. 이번 판결이 박지원 전 국가정보원장이 연루된 '서해 공무원 피격' 수사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대법원 2부(주심 천대엽 대법관)는 대통령기록물법 위반과 공용전자기록 등 손상 혐의로 기소된 백종천 전 청와대 외교안보실장과 조명균 전 청와대 안보비서관에게 각각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정상회담 회의록 폐기' 논란은 18대 대선을 앞둔 2012년 10월 통일부 국정감사에서 새누리당(현 국민의힘)이 '노무현 전 대통령이 2007년 남북정상회담에서 서해 북방한계선(NLL) 포기 발언을 했다'고 주장하면서 불거졌다. 여야는 2013년 7월 대통령기록관에서 회의록을 열람해 정확한 발언 내용을 확인하려고 했지만 초안은 없었다. 새누리당은 회의록이 고의로 폐기·은닉됐을 가능성이 있다며 노무현 정부 인사들을 검찰에 고발했다.
조 전 비서관은 2007년 평양 남북정상회담 회의록을 작성한 뒤, e지원시스템으로 문서관리카드를 생성하고 회의록을 첨부해 노 전 대통령에게 결재 상신했다. 수정·보완지시를 받은 뒤 해당 정보는 '계속 검토'로 남겨져있다가 삭제됐다. 검찰은 백 전 실장 등이 문서관리카드를 청와대 업무관리시스템인 'e지원'에서 무단으로 삭제했다며 재판에 넘겼다.
재판은 9년 동안 5차례 이어지며 유·무죄가 바뀌었다. 당초 1·2심은 두 사람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회의록 초본이 삭제된 건 맞지만, 노 전 대통령이 결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대통령기록물'로 볼 수 없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대법원은 2020년 하급심 판단을 뒤집고 유죄 취지로 사건을 서울고법에 돌려보냈다. 노 전 대통령이 회의록 초안 내용을 확인하고 서명했을 때 해당 문서관리카드를 공문서로 성립시킨다는 의사를 표시한 것으로 봐야 하기에 대통령기록물에 해당한다고 봤다. 회의록 초안은 후속 업무처리의 근거가 되는 기록으로 보존해야 할 공용전자기록으로 본 것이다. 서울고법은 지난 2월 파기환송심에서 이들에게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이번 판결이 검찰이 수사 중인 '서해 공무원 피격' 사건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는 분석도 있다. 국가정보원은 박지원 전 원장을 직권남용과 공용전자기록 등 손상 혐의로 고발했다. 국정원은 박 전 원장이 2020년 9월 이대준씨가 실종됐을 때 국정원이 생성한 내부 첩보문서를 무단으로 삭제하도록 지시한 것으로 보고 있다.
국정원 내부 기록은 대통령기록물에 해당하지 않지만, 업무수행 과정에서 생산된 첩보 및 정보보고서는 공용전자기록으로서 법에 따라 등록·관리해야 하고, 보존기간 절차에 따라 폐기해야 한다. 박 전 원장은 혐의를 부인하고 있지만 삭제 지시가 사실이라면 해당 보고서가 비밀에 해당하는지, 파기 규정에 따라 파기됐는지가 쟁점이 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