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도 내 한 마을은 지난해 전기요금 갈등으로 떠들썩했다. 한국전력이 농업인들에게 값싸게 제공하는 농사용 전력을 무단으로 가건축물이나 가전제품 등 주택에 끌어 쓰는 사례가 무더기로 적발됐는데, 되레 조사 과정에서 주민은 물론 시의원까지 나서 한전에 거세게 항의하면서다. 농사용 전기를 다른 목적으로 마구 쓰는 것을 막고자 하는 한전과, 특수 목적을 위해 제공되는 전력을 일상에서 마음껏 사용하고자 하는 주민들의 이해관계가 충돌한 셈이다.
3일 전력업계에 따르면 경남도 내 한전 A지사에서 지난해 2월~8월 농사용 전력 용도 위반 사용 실태 및 점검을 실시한 결과, 농사용 전기를 농업 말고 일상의 다른 곳에 활용한 사례는 무려 1,956곳에 달했다. 외국인 근로자들이 머무는 가설 숙소에서 농사용 전기를 쓰거나, 저온창고에 사용하기로 계약한 전기를 가정 내 에어컨이나 냉장고 등에 끌어 쓴 사례가 대표적이다.
지난해 한국전력통계 판매단가 추이에 따르면 농사용 전기는 킬로와트시(㎾h)당 45.95원으로, 109.16원에 팔린 주택용 전기에 비해 약 42% 수준에 팔렸다. 사실상 반값도 안 되는 가격에 생활전기를 사용한 셈이다. 업계 관계자에 따르면 한전은 사용 실태 점검에 앞서 두 달 동안 농사용 전력을 사용하는 모든 고객에 안내문을 보내고, 지역 곳곳에 33개의 현수막을 다는 등 사실상 단속 예고를 했음에도 2,000곳 가까이 적발된 것이다.
마을 전체가 농사용 전기를 일상에 활용하는 건 비단 이곳만이 아니다. 최근 전력업계에선 축사가 즐비한 충청권 한 마을을 또 다른 의심 사례로 살피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지역에서 만난 일부 주민들은 "축사에 쓰이는 전기를 집에 조금 갖다 쓰는 것일 뿐"이라며 농사용 전기를 가정용으로 활용하는 사례를 심각하지 않게 여겼다. 농사용 전기가 이동하는 전선을 먼 곳으로 연장하는 일 자체가 손쉬워 방법만 알면 누구나 활용할 수 있는 맹점을 파고든 것이다.
전력업계 한 관계자는 "농가를 운영하며 상대적으로 저렴한 전기를 사용하고자 하는 마음도 이해는 되지만 제값을 내고 전기 사용하는 걸 손해로 여기는 정서가 널리 퍼져있다"며 "한전과 계약위반은 확실하기 때문에 금액이 큰 경우엔 법정 다툼까지 가는 경우도 부쩍 늘고 있다"고 씁쓸해했다. 지난해 화훼 재배시설 일부를 일반에 개방해 관람용으로 수익을 올린 충남의 한 영농조합법인에 대해 대법원이 농업용 전기 사용으로 혜택 본 금액을 내놓으라는 판결을 내린 사례나 비닐하우스에서 농사용 전기를 끌어가 가상화폐를 채굴하다 적발된 사례가 대표적이다.
전기가 줄줄 새고 있다. 연료비 급등으로 전력구매 가격은 늘어났음에도 정부가 물가 상승을 우려해 요금을 꾹 눌러놓은 탓에 한전으로선 '전기를 팔수록 손해'인 구조가 지속돼 왔는데, 할인율 높은 농사용은 물론 산업용 전기 남용 사례가 늘고 있다. 이 결과로 한전의 적자는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금융정보업체 에프앤가이드에 따르면 1분기에만 7조7,869억 원의 적자를 낸 한전은 2분기에도 5조4,836억 원 적자가 예상된다. 상반기에만 13조 원 이상 적자를 기록, 지난해 연간 적자(약 5조8,601억 원)의 두 배가 넘는 손해를 볼 가능성이 높아진 것이다.
한전의 회사채 발행마저도 한계치에 닿자, 정부는 올해 들어 뒤늦게 전기요금 정상화에 한발씩 내딛고 있다. 앞서 정부는 4월 기준 연료비와 기후환경요금을 인상해 전기요금을 ㎾h당 6.9원 올린 뒤 7월엔 연료비 조정단가를 5원 올렸다. 10월엔 4.9원이 추가 인상될 예정이지만, 업계에선 이마저도 한전의 손해를 메우기엔 턱없이 부족한 터라 전기요금 추가 인상은 피할 수 없다는 견해가 많다.
전문가들은 언젠간 국민 세금으로 메워지게 될 한전 적자를 줄이기 위해선 전기요금 현실화만큼이나 산업 및 농업현장, 관공서, 가정 등 삶터 전반에서 효율적인 에너지 이용 및 절약이 뒤따라야 할 때라고 강조한다. 전력업계 관계자는 "전통적 에너지 부족 국가인 우리나라에서 낭비되는 에너지가 상당하다"며 "제철소가 많은 인천 해안가에선 폐열이 어마어마하게 버려지고 있고, 영세농을 배려한 농사용 전기도 목적에 맞지 않게 쓰이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했다. 2010년 전후 정부의 에너지 절감 정책과 맞물려 회자됐던 '에너지 다이어트(energy diet)'를 위한 노력이 다시 시작돼야 할 때란 얘기다.
업계와 학계에선 전체 전력 사용량의 3% 정도를 사용하는 농가의 전기 남용보다 전체의 절반 이상을 소비하는 제조업 현장에서의 에너지 낭비를 더 큰 걱정거리로 여긴다. 지난해 에너지경제연구원에 따르면 우리나라 산업부문 에너지 소비는 국내 전체 소비의 60% 이상을 차지한다. 가열이나 건조 공정에 석탄이나 석유제품, 액화천연가스(LNG)를 대신해 전기를 쓰는 '전기화'가 빨라지며 효율 개선 노력은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됐지만, 여전히 남용은 물론 부정 사용 사례가 늘고 있다.
한전에 따르면 실제 지난해 경기 광주시 한 공장에선 '편법 모자 분리'로 산업용 계약 전력을 초과해 활용한 사례도 드러났다. 계약 전력 4㎾ 이상~300㎾ 미만은 산업용전력(갑)이 적용되고, 300㎾ 이상은 상대적으로 비싼 산업용전력(을)로 분류되는 점을 간파, 공장 건물 안에 5개의 법인을 설립해 800㎾였던 계약 전력을 150㎾ 4곳과 200㎾ 한 곳으로 쪼개 전기요금을 줄인 것이다. 업계 관계자는 "전기로만 공장을 돌리는 경우 전기요금이 곧 생산비와 연결되니 최대한 낮추려는 게 공장주 마음일 것"이라면서도 "편법 모자 분리를 해주는 브로커까지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했다.
이처럼 생활 속에서 전기를 함부로 쓰는 분위기를 만든 이유로는 먼저 국제 수준에 비해 한참 낮은 전기요금이 꼽힌다. 한전에 따르면 시장환율 기준(2019년) 한국 전기요금은 독일과 일본, 영국, 프랑스 등보다 저렴하다. 산업용 전기요금의 메가와트시(㎿h)당 94.8달러에 거래된 한국은 150달러 안팎의 일본(164.3달러), 영국(147.1달러), 독일(146달러)과 비교해도 많이 싸다. 주거 부문 요금 격차는 더 크다. 한국(102.4달러)에 비해 독일(333.9달러)은 세 배, 일본(253.5달러), 영국(233.8달러)은 두 배를 넘는다.
심성희 에너지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정부가 수요 관리와 효율 향상이 중요하다는 점을 냉정하게 받아들이고 이를 정책 방향에 반영해야 한다"며 "무엇보다 전력 가격 기능 정상화와 에너지 가격 체계 개편을 어떻게 실현하느냐가 중요해 보인다"고 했다. 이덕환 서강대 화학과 명예교수는 "산업과 농업 고도화를 위해선 전기화는 꼭 필요한 과정"이라면서도 "산업현장은 물론 가정에서도 에너지 절감 노력을 기울여야 할 때"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