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석기시대 원시인을 멋쟁이라고? 아마 너무 과장된 표현이라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이미 5만 년 전쯤 인류 역사에 예술이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고, 세계 각지 유적에서도 소위 ‘패션’이라고 할 수 있는 유물이 보이기 시작한다. 신석기시대가 되면 몸을 장식하는 치레걸이 등 장신구들도 흔히 나타난다. 우리나라 신석기유적 중에서 가장 패션감각이 뛰어난 사람들이 발견된 곳이 경남 통영 앞바다 연대도의 7,000년 전 패총유적이다. 요즘처럼 개성을 중시하는 시대 감각으로 봐도 신석기시대 사람들의 패션 감각은 상상을 뛰어넘는다.
통영의 미륵도는 섬이지만 통영에서 짧은 다리 하나 건너면 되는 곳이니 사실상 육지와 다를 바가 없다. 게다가 통영 문화의 대표적 명소인 박경리문학관이나 전혁림미술관 등이 자리해 별도의 섬으로 생각하지 않게 된다. 섬의 남쪽 끝 달아항에서 배를 타려고 했지만 이미 떠났단다. 매표소 직원이 바로 옆 항구인 연명항에서 만지도로 간 다음, 거기서 연결된 출렁다리를 건너가란다. 배가 항구에서 나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승조원에게 ‘수평선 위의 어느 섬이 연대도인지‘ 물으니 뱃머리 앞 빤히 보이는 삼각형 섬이란다. 귀인이 늦게 도착해서 이름이 만지(晩地)가 되었다는 섬에 내려, 해안을 따라 이어지는 나무덱을 걸어 출렁다리로 가는데 풍경이 일품이다. 다리 아래 하얀 모래톱에서 흰옷을 입고 물을 즐기는 여인의 모습이 섬과 푸른 바다를 더욱 아름답게 보이게 한다. 아마 내가 찾아가는 선사시대인들도 이 한려수도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그러한 모습이 아니었을까?
출렁다리를 건너 연대도에 들어서니 연곡리(煙谷里)라는 이정표가 나오고 반달모양의 만(灣)을 둘러싸듯이 예쁘게 장식한 마을이 해안을 따라 펼쳐진다. 연대(煙臺)라는 이름은 조선시대 수군 통제영에서 설치한 봉수(신호로 올리던 불)에서 유래되었다. 마을 광장에 서 있는 '사패지 해제' 비석이 흥미롭다. 5대째 산다는 마을 분에게 들으니 이곳은 통영에 있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사당, 충렬사(忠烈祠)의 제수를 위해 왕이 내린 사패지(賜牌地)였는데 최근에야 해제되어 현재 사는 사람들의 재산권이 확보되었다고 하니 왕조의 유산이 현대의 삶에 이어지기도 한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연대도(煙臺島) 패총유적, 광장 한쪽에 위치한 경로당에서 나오는 할머니에게 어딘지를 물으니 모른단다. 말을 바꾸어서 "발굴하던 데가 어딘지 아십니까?" 물으니 "아, 그릇쪼가리 나온 데 말이가?"라며 마을 반대편 끝에 해안으로 삐죽이 나와 있는 나지막한 언덕을 넘어가란다. 우선 점심을 하려고 들른 식당의 주인 내외가 마침 30여 년 전에 발굴현장 인부로 참여했다고 한다. 1988년 이후 4차례 발굴을 담당했던 임학종 전 김해박물관장을 전화로 연결해주니, 터진 봇물처럼 당시의 무용담으로 꽃을 피운다. 아마도 나의 방문이 그 내외의 30여 년 전 경이로운 기억을 되살렸나보다. 바깥 주인 서씨는 모기들이 많은지 망사가 달린 모자를 들고 앞장서서 길을 안내해 주었다.
이제는 섬에 아이들이 없어서 폐교 후 환경교육센터로 변신한 구 연대초등학교 건물 동편에 평평한 잡초로 뒤덮여 있는 밭이 바로 패총을 발굴한 곳이란다. 사유지여서 철망으로 둘러쳐진 구역 내에 허물어진 집의 벽체가 남아 있는 곳에 국가사적 표지판이 서 있다. 패총, 또는 조개무지는 신석기시대 이후 바닷가에 살던 사람들이 음식물 쓰레기를 버린 곳이다. 그래서 오래된 패총들은 특별한 구조물이 없이 조개껍데기들이 흙과 섞여 쌓인 곳이 많다. 그런데 우리나라 다른 종류의 유적들과는 달리 패총에는 동물 뼈나 사람 뼈가 남아 있다. 조개껍데기 속에 든 회(灰)성분이 석회암 동굴과 마찬가지로 알칼리성이라 유기물이 잘 썩지 않아서다. 그래서 옛날 사람들의 먹거리를 말할 수 있어 고고학자들이 좋아하는 유적이다.
연대도 패총 유적 역시 사슴, 멧돼지 등 뭍동물과 강치, 수달 등 바다동물의 뼈뿐 아니라 사람 뼈까지 발견되어 세상 이목을 집중시킨 바 있다. 또 중요한 점은 아스라이 수평선 위로 보이는 대마도, 그리고 그 너머 일본 열도 규슈 지역 사람들도 이곳에 오간 것을 그 지역 토기나, 그곳에서만 나는 흑요석들이 유적에 남아 있어 알 수 있다. 당시 남해 문화의 흐름을 알 수 있는 유적인 셈이다.
연대도 패총은 1980년대 엄청난 피해를 가져왔던 태풍 셀마가 이곳을 휩쓸고 지나가면서 해안 언덕이 깎여나간 단면에 흑요석편, 돌도끼, 토기들이 박혀있는 것이 드러나면서 발견됐다. 국립진주박물관이 1988년부터 1992년까지 네 차례 발굴을 진행했다. 발굴에서 당시로서는 깜짝 놀랄 장면이 나왔는데, 15기의 무덤이 드러난 마을 공동묘지에서 더 많은 인골들이 발굴된 것이다.
아마도 오늘날 사람들에게는 음식 쓰레기 더미 속에서 시체가 발견되었다고 하면 엽기적이란 생각이 들겠지만, 돌과 토기 등으로 바닥을 정리한 다음 몸을 하늘로 바로 누이고 많은 부장품과 함께 묻은 뒤 이 지역 해안에 보이는 예쁜 몽돌(바다자갈)들을 수북이 덮었으니 당연히 예의를 갖추고 장례를 지낸 것을 알 수 있다. 플라스틱이나 금속을 사용하지 않았던 이 시대에는 조개무지라 하더라도 다른 땅과 별반 다르게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자연공간과 자원을 사용하는 방법이 오늘날과는 근본적으로 달랐음을 보여준다.
연대도 패총에서 장신구를 착용한 인골이 다수 나왔는데, 그중 7호묘는 돌고래, 수달, 너구리 이빨을 가공해 만든 발찌를 차고 있던 남성의 무덤이었다. 발찌를 하고 있는 중년 남성은 요즘 여성들도 발찌를 하는 경우가 흔하지 않다는 점에서 정말 멋쟁이 아저씨이다. 유적에는 남아 있지 않지만, 개성있는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위해 전신에 장식했을 것으로 상상된다. 이미 구석기시대에도 동물뼈뿐 아니라 다람쥐 꼬리털로 장식한 어린이가 프랑스에서 발견되기도 했다. 몸의 문신은 인류의 가장 오래된 예술행위라고 추정한다는 점에서 유적 인골에 남은 조가비로 만든 팔찌와 발찌 말고도 여러가지 예쁜 것으로 아름답게 장식하였을 것이다. 오늘날에는 조개무지 속에서 인골뼈와 조가비 장신구 유물만으로 발견되지만 실제로는 당시 최고의 멋쟁이 패션이었을 것이다.
대부분의 연대도 남녀들은 잠수하면 흔히 생기는 귓병(外耳道骨腫)을 앓고 있었다. 이러한 병리학적 흔적이 남아있는 연대도 여성의 인골은 세계무형유산으로 지정된 우리나라 해녀의 가장 오래된 흔적일 것이다. 연대도 주변에는 파도에 굴러서 둥글게 된 자갈돌이 깔린 해안이 보이고 곳곳에 바위가 드러난 해안지역이 많다. 굴이 압도적으로 나타나는 서해안 패총과는 달리 이곳에서 신석기시대 살았던 여인들은 어류뿐 아니라 두어 길 맑은 물속에 사는 소라고둥을 잡기 위해 다이빙을 했을 것이다. 고된 삶을 살면서도 아름다움을 추구한 이 여인들에게 내 마음속에도 인간적인 연민이 배어 나오는 여행길이다.
통영예술이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곳이 바로 우리나라 최고의 선사예술유적 연대도 패총이다. 발찌를 비롯한 연대도의 개성이 넘치는 신체장식예술과 먼 바다를 건너 다니는 남해인들의 삶의 속성으로 미루어 음악 역시 그 만남의 현장에서 복합적으로 행해진 것을 상상할 수 있지 않을까? 세상에서 가장 풍요로운 해안의 삶에서 아름답게 꾸미고 즐겁게 노래하고 춤추는 시간이 넉넉한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그 모습을 보지는 못하지만, 팔찌와 발찌가 그러한 상상을 충분히 입증하는 셈이다. 아직도 유적에 남아있을 그들의 집자리 등 삶의 흔적들도 궁금하기 짝이 없지만, 디지털시대에 신석기시대 남해의 멋쟁이 남녀의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 있는 전시공간이 아직 없다는 현실은 더욱 아쉽기만 하다. 잡초밭 위로 솟은 달맞이꽃만이 오는 사람을 반기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