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오 드라기 이탈리아 총리가 두 차례 사의 표명 끝에 결국 자리에서 물러난다. 드라기 총리가 이끌어 온 거국 내각도 사실상 붕괴했다. 연립정부를 구성한 정당 일부가 드라기 총리와 갈등을 빚으며 지지를 철회한 탓이다. 드라기 총리 사임으로 조기 총선이 불가피해지면서 이탈리아는 경제 위기에 정치 혼란까지 더해져 격랑으로 빠져들고 있다.
드라기 총리는 21일(현지시간) 하원에 출석해 공식적으로 사퇴 의사를 밝힌 뒤 곧바로 세르조 마타렐라 대통령을 찾아가 사임서를 제출했다. 마타렐라 대통령은 사임을 수용하고 “주요 현안 처리를 위해 정부는 유지해 달라”고 요청했다.
드라기 총리는 전날 상원에서 진행된 신임안 투표에서 승리했지만, 내각에 참여한 주요 정당 3곳이 표결에 불참하자 결국 사임을 택한 것으로 보인다.
앞서 상원은 찬성 95표 반대 38표로 드라기 내각을 재신임했다. 전체 의석 과반이 넘는 192명이 표결에 참여해 133명이 표를 던졌다. 드라기 총리도 표결에 앞서 “주요 정당들의 전폭적인 지지가 뒷받침된다면 총리직을 계속 수행할 수 있다”는 뜻을 내비쳤다.
하지만 연정 붕괴에 단초를 제공한 원내 최대 정당이자 연정 중심축인 범좌파 ‘오성운동(M5S)’은 물론, 중도 우파 ‘전진 이탈리아(FI)’와 극우 정당 ‘동맹(Lega)’까지 표결을 거부해 재신임 의미가 퇴색했다.
드라기 총리는 지난 14일에도 오성운동이 상원 민생지원법안 표결에 불참하자 “오성운동 지지 없이는 내각을 이끌 수 없다”며 총리직 사임 의사를 밝혔다. 에너지 대란과 물가 상승 등으로 경제 위기가 심화하는 상황에서 민생 안정 대책을 포함한 사회·경제 정책을 두고 오성운동 당수인 주세페 콘테 전 총리와 갈등은 빚은 게 발단이 됐다. 마타렐라 대통령은 즉시 사임을 반려하고 의회에서 다시 신임을 묻도록 했다.
신임안 표결을 앞두고 이탈리아 전역의 시장 2,000명과 재계, 노동계 등이 드라기 내각 존속을 촉구하는 호소문을 냈다. 나라 밖에서는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과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페드로 산체스 스페인 총리 등이 공개적으로 드라기 총리 잔류에 힘을 실었다. 하지만 끝내 이탈리아 내각 붕괴를 막지 못했다.
이탈리아 총리 출신인 파올로 젠틸로니 EU 경제 담당 집행위원은 트위터를 통해 이탈리아 정치권의 무책임을 성토하며 “드라기 총리의 사임으로 이탈리아는 여러 악재가 한꺼번에 몰아치는 ‘퍼펙트 스톰’(초대형 복합위기)에 직면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제 칼자루는 마타렐라 대통령에게 넘어갔다. 마타렐라 대통령은 새 총리 후보자를 지명해 총선이 예정된 내년 상반기까지 한시 내각을 운영할지, 혹은 의회를 해산하고 가을 조기 총선을 실시할지 결정해야 한다. 이탈리아 정계에서는 드라기 총리를 대체할 인물이 부재하다는 점에서 조기 총선에 무게를 싣는 관측이 많다. 시기는 9월 말이나 10월 초가 유력하게 거론된다.
현지 언론은 조기 총선이 치러질 경우 현재 지지율이 가장 높은 극우 정당 ‘이탈리아 형제들(FdI)’이 승리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차기 내각은 ‘이탈리아 형제들’을 중심으로 ‘전진 이탈리아’와 ‘동맹’ 등 우파 정당들로 구성될 가능성이 크다. ‘EU 빅3’ 중 한 곳에 ‘유럽 회의론자’ 정부가 들어설 가능성이 높아진 것이다.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유럽은 “드라기 총리 퇴임은 인플레이션이 치솟고 유럽에서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시기에 가장 경험이 풍부한 지도자 중 한 명을 EU에서 빼앗았다”고 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