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정부의 예산 정책과 재정건전성 회복 방안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지출 구조조정’이다. 이를 바탕으로 기획재정부는 지난 7일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5년간 연간 관리재정수지 적자 3% 이내 유지” 등의 건전재정 관리목표를 제시하기도 했다.
하지만 불행히도 한국에서 실질적인 예산지출 구조조정은 '전인미답'의 영역이다. 거의 모든 정부가 예외 없이 불필요한 예산 지출을 줄여 생산적인 분야로 돌리겠다고 약속했고, 매년 예산안 편성 방침에 이를 명시하고 있지만 아직 한번도 성공하지 못했다.
이는 “7조 원의 예산을 구조조정해 재원으로 활용했다”고 스스로 밝힌 올해 5월 윤석열 정부의 첫 추가경정예산안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강력한 지출 구조조정으로 재정건전성 회복의 기틀을 닦겠다”고 표방한 정부의 첫 시도였음에도 말이다.
전문가들은 지속가능한 재정구조를 위해서는 무늬만 그럴싸한 숫자 조정이 아닌 실질적인 예산 절감이 절실하지만, 지금까지의 접근 방식과 구조로는 앞으로도 결코 달성이 쉽지 않을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지출 구조조정은 국가 재정 운용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각종 예산에서 필요성 낮은 사업을 정돈해 예산지출 규모를 줄이거나 없애는 행위를 말한다.
윤석열 정부는 출범 직후인 지난 5월 13일 ‘2023년도 예산안 편성 추가지침’을 각 부처에 하달했다. 당시 기재부는 “모든 재량지출 사업을 원점에서 재검토해 최소 10%를 의무적으로 구조조정하라”고 통보하면서 “의무지출의 경우에도 사회보장시스템 활용 확대, 부정수급 방지 등 지출효율화 방안을 반드시 마련하도록 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는 새로운 방침이 아니다. 앞서 문재인 정부에서 기재부가 올해 3월 각 부처에 통보했던 ‘2023년도 예산안 편성 지침’에도 “집행부진 및 보조ㆍ출연사업 등에 대한 전면적 구조조정을 통해 경직성 경비 등을 제외한 모든 재량지출의 10% 수준을 절감할 계획”이 명시돼 있다.
지난해의 ‘2022년도 예산안 편성 지침’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기재부는 △원칙적으로 필수 소요를 제외한 재량지출의 10% 구조조정 추진 △부처의 자발적 구조조정 이행 실적에 따라 인센티브‧페널티 부여 방침을 통보했다.
윤석열 정부는 올해 5월 총 59조 원 규모의 2차 추경안을 국회에 제출하면서 “7조 원의 지출 구조조정으로 추경 재원 마련을 뒷받침했다”고 밝혔다. 이는 윤석열 정부의 첫 지출 구조조정 사례다. 대규모 초과세수와 지출 구조조정 등으로 마련한 재원으로 국채 발행 없이 23조 원의 코로나 손실보전금을 지급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라살림연구소 분석에 따르면, 정부의 구조조정으로 당초 책정돼 있던 예산액이 감액된 100대 예산사업 대부분은 진정한 의미의 지출 구조조정과 거리가 멀었다. 7조 원의 85%가량인 5조9,000억 원 규모 100대 사업의 감액 유형은 크게 4가지로 분류된다.
윤석열 정부는 이번 추경안에서 7조 원의 4분의 1가량인 약 1조6,000억 원의 국방예산을 구조조정했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손실보전금을 위해 국방력을 포기했다”는 비판이 제기됐지만 엄밀히 말해 이는 사실이 아니다. 중장기 사업이 다수인 국방예산 중 올해 예산액이 깎인 사업 대부분은 내년 이후로 예산 집행시기만 연기한 것이기 때문이다.
국방부는 당초 1조6,327억 원에 달했던 ‘항공장비 유지’ 예산을 2차 추경에서 1,006억 원 줄였다. 대신 2022년 지출액을 줄이는 만큼 2023년 예산을 늘리는 게 조건이다. 즉 항공장비 유지 예산을 구조조정한 게 아니라 내년으로 집행시기를 미룬 ‘예산 지출시기 조절’인 셈이다. 국방부는 주한미군 방위비분담금 중 군사시설개선 예산에서도 730억 원의 지출시기를 올해 이후로 조절해 아꼈다.
각종 무기를 개발ㆍ구매하는 방위사업청 역시 올해 계획했던 다수 사업의 지출시기를 내년 이후로 조절했다. 방사청은 올해 2,691억 원이던 ‘해상작전헬기’ 예산에서 526억 원을 구조조정했다. “주 장비 및 어뢰 등의 대금지급을 조정했다”는 게 근거다. ‘잠수함구조함’ 예산 400억 원도 지출시기를 조절했고, 768억 원이던 ‘검독수리-B Batch-Ⅱ’(해군의 노후 고속정을 대체하는 연안경계전력 확보 사업) 예산에서도 270억 원을 지출시기 조정으로 구조조정했다. 올해 3,273억 원이던 ‘울산급 Batch-III’(해군이 추진 중인 3500톤급 호위함 6척을 개발, 배치하는 사업) 예산도 200억 원이 지출시기 조절로 구조조정됐다.
이밖에 농림부는 농업재해보험 예산 1,000억 원을 구조조정했다. 이 역시 “미지급 보험금을 향후 3년에 걸쳐 상환하기로 시기를 조절”해 마련한 돈이다.
7조 원 가운데 가장 큰 규모를 차지하는 지출 구조조정 유형은 이른바 ‘불용액 선인식’이다. 불용액은 여러 사정으로 그해 계획했던 액수만큼 사용하지 못하는 예산을 말한다. 정부가 5월에 판단하건대, 연말까지 못 쓰고 남을 것이 확실시되는 예산을 미리 줄여 다른 예산의 재원으로 돌렸다는 의미다.
하지만 이 역시 올해는 불용액이지만 사업의 목적 자체가 사라지지 않는 한 대부분 예산은 내년 이후 재편성된다. 국가 예산 전체로 보면 올해 소멸되지만 내년 이후엔 부활하는 ‘어차피 써야 할 예산’으로 볼 수 있다.
환경부는 8,927억 원의 올해 ‘수소차 보급 및 수소충전소 설치사업’ 예산에서 2,250억 원을 불용액으로 선인식해 구조조정했다. “세계적인 차량용 반도체 수급난 영향으로 2021년에도 4,416억 원 예산 가운데 1,207억 원을 사용하지 못했다”는 이유에서였다. 차량용 반도체 공급난이 풀리면 내년 이후 다시 써야 할 예산이지만 정부는 이를 지출 구조조정으로 표현한 것이다.
우체국예금 지급이자와 반환금 예산은 9,800억 원 가운데 1,200억 원이 “기준금리 인상 시점이 늦어졌다”며 불용액으로 분류됐다. 이 예산은 지난해에도 2,407억 원이 불용됐는데, 최근처럼 기준금리가 급등하면 내년 이후에는 결국 써야 할 돈으로 해석할 수 있다.
각종 사회간접자본(SOC) 예산에서도 불용액이 쏟아졌다. 도담-영천 복선전철 사업 예산은 “안동-영천 구간 복선화 결정에 따라 설계가 변경됐다”는 이유로 2,904억 원 가운데 1,100억 원이 불용액으로 돌려졌다. 교육부의 그린스마트 스쿨 조성 예산은 5,194억 원 가운데 878억 원이 불용액이 됐다. “2021년 943억 원이던 전체 사업예산이 5배 이상 급증한 이후 실제 집행이 곤란하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광주송정-순천 전철화 사업 예산에서도 804억 원이 불용액 처리됐다. “순천역 지하화 요구 등으로 기본계획 일정이 순연됐다”는 이유에서다. 함양-울산고속도로 건설 예산 485억 원은 “용지보상 협의 지연과 민원 등으로 공사비가 감액됐다”며 불용액으로 처리됐다.
농림부의 재해대책비 예산도 2,000억 원 가운데 700억 원이 불용액이 됐다. “재해발생 규모가 적어 불용이 예상된다”는 이유다. 아프리카 차관 예산 515억 원은 “수혜국의 집행연기 가능성이 증가했다”며 불용액이 됐고, 공무원연금기금의 공무원 퇴직수당 예산 500억 원은 “퇴직인원 감소로 계획 대비 집행이 부진할 것으로 예상된다”며 불용액으로 돌려졌다.
7조 원 가운데 1조2,000억 원가량은 정부 예산의 지출 방식을 바꿔 같은 규모의 사업을 진행하면서도 장부상 돈을 아끼는 효과를 내는 이른바 ‘이차 보전’ 사업으로 지출 구조조정을 했다.
정부는 취약층과 각종 산업 육성 등을 위해 다양한 융자사업을 한다. 이때 정부가 예산으로 직접 융자를 하면 초기 투자액은 크지만 추후 원금과 이자가 수입으로 돌아와 대부분 지출이 다시 채워진다. 하지만 이를 직접융자 대신 ‘이자의 차액(이차)’만 보전해 주는 방식으로 바꾸면 정부로서는 1회에 한해 투자액을 크게 절감할 수 있다.
가령 시중금리가 연 5%일 때 특정 융자사업에 정부가 저리(연 2%)로 1억 원을 직접융자한다면 정부는 예산 1억 원을 지출하고 추후 원금 1억 원과 이자 200만 원을 국고로 회수한다. 반면 이를 이차보전 방식으로 돌리면, 이자 5%를 받는 민간 금융기관에 1억 원을 대신 대출해 주도록 하고 정부는 그 기관에 이자액 차이(3%포인트) 300만 원만 보전해주면 되는 것이다. 정부로서는 최초 예산 지출액 1억 원이 300만 원으로 크게 줄어드는 셈인데, 9,700만 원의 예산 지출을 줄였다고 해서 이를 불필요한 예산지출을 절감한 지출 구조조정이라 부르기는 어렵다.
국토교통부는 9조5,300억 원이 책정돼 있던 ‘주택구입ㆍ전세자금 융자 사업’ 예산을 이차보전 방식으로 바꿔 1조 원을 지출 구조조정했다. 산업통상자원부는 6,590억 원이던 신재생에너지금융지원 사업 예산에 이차보전 방식으로 적용해 868억 원을 절감했다.
윤석열 정부는 지난 6일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발표한 ‘새 정부 재정운용방향’에서 “특히 직접 융자사업을 민간금융을 활용하는 이차보전 사업으로 전환해 예산지출 규모는 줄이고 수혜 규모는 유지ㆍ확대하겠다”고 천명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같은 방식은 이차보전으로 전환되는 순간에만 예산지출액이 줄어들 뿐 이후에는 더 이상 절감 효과가 없다는 점에서 지출 구조조정으로 분류하기는 어렵다는 평가가 많다.
7조 원 가운데는 진정한 의미의 지출 구조조정에 가까운 감액 항목도 일부 포함돼 있다.
국방부는 6,008억 원의 인건비 예산에서 738억 원을 “연가 보상비 1일분 감액”을 통해 구조조정했다. 연가 보상비 예산을 줄이는 대신, 직원들의 휴가를 장려해 예산 지출을 줄이겠다는 취지로 해석된다.
농림축산식품부는 수리시설 개보수(530억 원), 농촌용수 개발(250억 원), 배수 개선(230억 원) 예산을 각각 구조조정했다. 기재부는 국유재산관리기금의 비축토지 매입 예산 200억 원을 구조조정했다. 하지만 이들 항목은 7조 원의 극히 일부분에 불과할 정도로 비중이 미미한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