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랑인가, 수치인가." 속도 제한이 없는 독일 아우토반(고속도로)에 따라붙는 질문이다. '독일의 상징'으로 둬야 한다는 주장과 '제한 속도를 설정해 기후재앙 등 각종 부작용을 막아야 한다'는 주장이 맞붙은 지 오래다. 러시아가 일으킨 전쟁은 아우토반 논쟁에 다시 불을 붙였다.
독일 교통부는 13일(현지시간) 운송 부문에 대한 '긴급 기후 보호 조치 패키지'를 발표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야기한 에너지 위기로 기후 관련 정책이 일부 후퇴했지만, 기후 대응 의지에는 변함이 없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패키지에는 △전기차 충전소 추가 설치 △자전거 기반시설 개선 △대중교통 체계 정비·강화 등이 담겼다.
독일인들의 시선은 정부가 '말한 것'보다 '말하지 않은 것'에 쏠렸다. 아우토반 속도를 제한하면 연료를 절약할 수 있는데, 관련 조치는 '쏙' 뺐다는 것이다. 비영리단체인 독일환경지원은 '시속 100㎞ 제한'을 주장하며 "그러면 하루 1,000만 리터의 휘발유와 디젤을 절약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독일 아우토반 길이는 1만3,000㎞ 정도인데, 약 70% 구간에 속도 제한이 없다.
아우토반은 오랜 기간 논쟁 대상이었다. 1980년대부터 속도 제한 요구가 있었는데, 최근 기후 위기에 대한 관심과 함께 주목도가 커졌다.
아우토반 속도 제한을 주장하며 베를린의 아우토반 진입로를 막는 시위를 하고 있는 독일의 급진적 시민단체 '마지막 세대'는 한국일보 인터뷰에서 "이산화탄소 배출을 줄이기 위해서는 '결정적 조치'가 필요하고, 이를 위해서는 급격하게 저항할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독일경제연구소에 따르면, 속도를 100㎞로 제한하면 탄소 배출량이 연 900만 톤 줄어든다고 한다.
정치권에서는 녹색당이 이슈를 주도하고 있다. 2019년 '시속 130㎞ 제한'을 담은 법안을 발의했지만 의회에서 부결됐다. 녹색당은 지난해 연방하원 선거에서도 같은 주장을 폈다. 녹색당은 환경 보호 측면에서도 중요하지만, 안전 사고 방지를 위해서도 필요한 조치라고 강조한다.
속도 제한 도입을 주장하는 쪽에서는 독일이 기후 위기 대응에 열을 올리면서 정작 속도 제한을 두지 않는 게 모순이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당장은 속도 제한이 도입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지난해 독일 내각 구성 당시 합의가 불발됐기 때문이다.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는 최근에도 속도 제한을 둘 가능성에 고개를 저었다.
정치권이 주저하는 건 사회적 합의가 아직 이뤄지지 않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일단 '고속도로 속도 제한이 없는 유일한 국가'라는 상징을 포기해야 하느냐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독일이 자동차 산업 강국이기에 더 그렇다. '속도 제한을 두지 않아도 시속 160㎞로 달리는 운전자들은 2%에 불과하다'는 조사도 있다. 따라서 아우토반에 대한 논쟁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