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기업들은 제품 연구개발(R&D) 분야에 석·박사급 고급 인력이 필요하다고 호소하고 있지만, 정작 반도체 관련 전공 대학원 10곳 중 1곳은 지원자가 단 1명도 없는 위기 상태인 것으로 조사됐다. 특히 박사과정의 경우 외국인 유학생 비중이 전체의 20%에 육박했다. 교육 현장에선 학부에서 대학원으로 이어지는 연구 생태계 붕괴가 반도체 산업 전반의 위기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14일 한국일보가 김병욱 국민의힘 의원실이 교육부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와 한국교육개발원의 고등교육통계를 분석한 결과, 2021학년도 반도체 관련 대학원 학과 278곳 중 지원자가 1명도 없었던 곳이 33곳이나 됐다. 지원자가 1~10명에 불과한 학과도 126곳이었다. 절반이 넘는(57.1%) 학과의 석·박사 지원자가 10명 이하인 것이다. 분석은 산업통상자원부 기준에 따라 소계열이 반도체·세라믹공학, 재료공학, 전자공학, 화학공학에 해당하는 학과 등을 대상으로 진행했다.
지원자가 없었던 곳은 전북대 반도체공학과, 한국산업기술대 나노반도체공학전공, 순천대 전자공학과, 강릉원주대 전자공학과, 가톨릭관동대 전자공학과, 한남대 전자공학과 등이었다. 주로 지방대 대학원들이었다.
반도체 관련 대학원의 2021학년도 외국인 유학생은 951명이었다. 이 중 박사과정 학생은 629명으로, 전체 박사과정 재학생(3,513명)의 17.9%에 달했다. 외국인 석·박사 유학생이 가장 많은 곳은 성균관대 전자전기컴퓨터공학과다. 재학생 463명 중 72명이 외국인이다. 울산대 전기전자컴퓨터공학과의 경우 대학원 재학생 87명 중 54명이 외국인 유학생이었다. 이처럼 외국인 석·박사 유학생 비중이 높아지고 있지만, 정작 기술 보안을 중시하는 기업들은 이들의 채용을 꺼리는 게 현실이다.
전문가들은 대학원의 부실화로 인한 '반도체 학술 생태계의 위기'가 심각하다고 지적한다. 이정희 경북대 전자공학부 교수는 "10여 년 전엔 반도체 전공 대학원생이 60~70명에 달했는데 지금은 절반 수준인 30명으로 줄었다"고 말했다. 한국 학생들의 자리를 외국인 유학생들이 메우고 있다. 이 교수는 "반도체 전공 외국인 유학생은 10% 미만이었는데 지금은 거의 30% 수준"이라고 말했다.
주된 원인은 줄어든 정부의 연구개발 예산 때문이다. 연구비가 줄면 반도체를 연구할 교수가 줄고, 이는 고급 인력 양성에 차질이 빚어지는 악순환으로 이어진다. 황철성 서울대 재료공학부 석좌교수는 "서울대 재료공학부의 경우 교수가 43명이 있는데, 반도체를 연구하는 교수가 2, 3명밖에 없다. 교수가 없으니 학생들은 대학원에서 반도체를 공부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한국반도체디스플레이기술학회에 따르면 정부의 반도체 연구개발 지원 예산은 2009년 1,003억 원에서 2017년 314억 원으로 줄었다. 황 교수는 올해 정부가 지원하는 반도체 연구비는 500억 원가량이며, 2032년까지 석·박사급 반도체 인력은 5,500여 명 부족할 것으로 추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