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학계의 표절 문제는 학문에 대한 인식 수준, 사회 윤리 의식 결여를 반영하는 부끄러운 일이다. 학문의 중요한 특징은 보편화와 개방성이다. 자연과학, 인문사회과학 가릴 것 없이 학문은 동일한 의식과 시각 위에서 발전해 왔다. 연구자는 연구 대상의 이론적 배경, 가설 설계, 실험 증명 자료, 출처 분석 과정과 결과를 특정 분야의 공동체 전체와 공유함으로써 학문 발전에 기여한다.
논문, 저서에서 공유와 소통의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 각주(脚註)다. 저자들은 논문, 참고, 출처, 자료, 보충설명, 관계문헌 등을 주(註)를 통해 빠짐없이 밝혀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주는 학자의 도덕 윤리성의 척도이다.
한국 학계에서 주가 소홀히 취급되고 표절 문제가 빈발하는 이유는 뭘까. 첫째 교육의 문제다. 주의 중요성에 대한 교육은 대학 학부과정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교수진은 학과 논문에 표절이 밝혀지면 무조건 F학점을 준다는 원칙을 세워야 한다. 이 원칙을 엄격히 지켜 학부 시절부터 표절의 심각성을 인식하도록 해야 한다. 한국 대학 교육이 이런 수준에 와 있는지 의문이다.
두 번째 이유는 학계가 정부·기업과 맺고 있는 복잡한 관계다. 정부, 공공기관, 기업에서 발주하는 용역 사업이나 자문 청구 등으로 교수들이 연구와 수업, 논문 지도에 전념할 시간이 부족하지 않나 싶다. 시간에 쫓기다 보면 연구를 공저자, 조교, 연구보조원에 의뢰한다. 주에 대한 인식의 차이가 있는 분업 구성원들은 표절 등 편법을 동원해 논문 제출 시한 맞추기, 가짓수 부풀리기에 급급하게 된다. 교육부와 학술지원 단체들이 학자의 연구 실적과 대학 평가기준을 학술지 인용 분량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관행도 문제다.
현역 교수들이 기초연구와 수업에만 집중하도록 용역, 자문을 억제하는 방법은 없을까? 기업의 연구·개발(R&D)은 사내 인원으로 충당하고 정책 자문에 기여할 인재는 정년퇴직한 명예교수 등에게 맡기는 방안은 어떨까? 교수 인력은 사회 자산이다. 교수들의 기초학문 연구를 장려하는 학풍 없이는 대학 교육의 질적 향상은 물론 노벨상 수상자 기대도 어렵다.
셋째, 출판업계도 문제다. 출판업계는 모든 출판물의 최종 감사기관이다. 표절 및 출판 규범 위반을 지적하는 역할도 마땅히 해야 한다. 출판계가 비공식적 사정 기능을 책임진다면 학계의 도덕성 제고에도 공헌하게 된다.
표절은 사회 전반의 도덕 윤리와 직결된 문제다. 내적 실력양성론자로 알려진 도산 안창호 선생은 20세기 초 독립운동 당시 우리 민족이 당면한 가장 중요한 일은 정직과 신뢰가 넘쳐나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 세기가 지난 오늘의 한국 사회는 어떤가? 도산의 혜안이 여전히 절실하다.